글 수 39
정윤경
조회 수 : 126
2017.10.20 (01:42:27)



 

이 사이트는 "꽃피는 봄이 오면"의 msn010.gif '사회주의 독립유공자 ' msn010.gif 와 관련되어 있음을 공지합니다.  




                 


                  





"꿍

따리샤바라" 편의 8번 항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1920년 11월 4일 신한민보


상해한인학교 여운형.JPG







신문 기사를 대할 때마다 늘 혼동스러운 여원홍, 여운홍, 여운형 3인의 문제를 다시 한번 정리해볼까 합니다.


                                                                                                     200%



           



 A. 신한민보 1913년 10월 17일 (기사 제목 : 상항 지방회보)

여운형 상항.png


B. 신한민보 1913년 11월 21일 (기사 제목 : 상항지방회보)

려운홍 입회.jpg


위 신한민보

                      상항(샌프란시스코)지방회보라는 제목의 두 기사 중  A는 1913년 10월 17일에 보도된 것이고 기사 B는 1913년 11월 21일에 보도된 것입니다. 보도된 날짜만 한달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동회장 신한씨의 보고"라는 점,  보고에 등장하는 인물인 길원, 곽림대, 조종현, 조인성 네 사람의 이름이 모두 같다는 점에서 똑같은 내용의 기사인 듯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같은 내용의 기사에서 려운형의 이름과 려운홍의 이름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백과사전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언론 매체에서는 여운홍과 여운형을 형제지간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언론에 여운형의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기 시작하던 즈음인  1913년,  위 신문기록은 이 두사람이 동일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데, 위 A기사의 여운형 이름 아래 있는 조인성에 대해 "부인"이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기사의 내용대로라면 조인성은 여운형의 부인이 되는 셈입니다.  여원형은 1886년 출생이라고 합니다.  1913년, 그의 나이는 28세가 됩니다. 그 당시라면 이미 결혼을 했을 법한 나이이기도 합니다. 반면, 그의 동생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는 여운홍은 1991년 생으로 , 1913년의 그의 나이는 23세로 결혼하기에는 여전히 나이가 어려보입니다.


백과사전 기록을 보면 여운형과 여운홍의 일대기가 서로 뒤섞여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위 기사의 여운홍이 실지로는 여운형과 동일인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게 해주는 또 다른 단서는 여원홍과 그의 동생 여운홍의 상해 임시정부 경력과 관계된 부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먼저, 백과사전에 기록된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의 미국 유학 시절과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보겠습니다.



여운홍 (1891~ 1973)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C%97%AC%EC%9A%B4%ED%99%8D)


<유학시절>

1913년 6월 배를 타고 도미, 1913년 9월 16일 로스앤젤레스 주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오갈데 없던 여운홍은 바로 대한인 국민회에 도착했고, 오하이오 주우스터 대학에 입학했다. 학비를 마련해야 했던 여운홍은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했다. 시카고 주 레이크폴리스트에는 백만장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한때 여운홍은 이곳에서 새벽4시에 일어나 부잣집의 보일러 화구에 석탄을 넣는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보일러채난 아르바이트가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1918 6 오하이오 주우스터 대학을 졸업했다. 우스터 대학을 졸업한 여운홍은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원으로 진학한다.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원에서는 희랍어를 주로 배웠으나, 그해 11서반아 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1917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자, 한때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이기도 했던 그를 만나고자 소개장을 얻어 찾아가려 했다. 대학 교수와 목사 몇인의 소개장을 들고 19171115백악관을 찾았으나 영어가 서투르던 그는 한참만에 경호실을 통과하여 백악관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윌슨의 비서 그라스의 면담거절로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유학시절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약소민족의 비애를 호소했고, 191811월 말 프린스턴에서의 짐을 정리하고 프린스턴 대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게 된다1918 하와이를 거쳐 1919 216 귀국하였다. 귀국 중 일본 도쿄를 경유, 당시 일본을 유학 중이던 김성수, 송진우, 윤치영 등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미국 교포들의 현황과 독립자금 모금 현황을 알려주었다


<임시정부 활동>

1919년 227 중국 상하이에 도착 , 4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누군가는 이승만을 수반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신채호는 강하게 반발하는 등 임시정부 내의 파벌싸움을 보고 실망했다고 한다. 4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 개설되자 그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1918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당할 때에도 참여하였다. 19196월에는 김규식, 김탕 등과 함께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어 프랑스에 다녀왔다. 그러나 열강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위원부의 노력을 묵살하자 실망한 그는 김규식을 따라 19198미국으로 건너간다1919 3.1운동 직전에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출국,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1919 4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 되었고, 그 해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참석하였으나 열강의 외면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김규식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20 상하이의 한국인 학교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에 부임하여 학교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기금을 모금활동을 하였다





위 백과사전에 기록된 여운홍의 미국 유학시절 기록은 위 기사 A의 여운형의 유학시절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래 신문은 국민보로, 위 A,B 기사보다 한달 빠른 1913년 9월 24일의 기사입니다.


( 기사 제목 :  본국으로 쫓아오는 학생 여운홍은 미주로 향함 )


여운홍 유학.JPG 



"일즉이 배편에 본국으로 좇아 나오는 학생 여운홍씨는 잠시 하륙하였다가 즉시 발정하여 미주로 향하였더라. 씨는 원래 경신학교와 배재학당에서 수업을 하였고  근년에 이르러는 청년회 성경 강론회에서 큰 열심을 발하여 많은 일을 하였었고 이제 미주로 향함은 유학하기로 유일한 목적을 정함이라함"  


위 국민보 기사는 여운홍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 전의 기사로, 당시 국민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한인 국민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는 신문이었습니다. 여운홍이 미국에 도착해 대한인 국민회에 가입하기 이전에 벌써 국민보가 그의 행적을 언론에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보통 신분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 위 기사에서 여운홍이 경신학교와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아래는 위키백과 배재학당에서 캡쳐해온 것입니다. 위키백과 / 배재학당  https://ko.wikipedia.org/wiki/%EB%B0%B0%EC%9E%AC%ED%95%99%EB%8B%B9


배재학당(培材學堂)은 1885년 8월 3일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서울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  1886년 고종이 영재를 배양한다는 의미의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액(額)을 내리었다.


배재학당.JPG


배재학당은 미국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계 학교로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의 대학급 이상 가는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참고로, 만일 위 백과사전의 여운홍이 경신학교 졸업 후 배재학당에서 공부하고 거기에 더해 성경 강론회에서 많은 일을 하고  23세에  미국 유학에 나선다는 것은  나이대로 볼 때 도저히 맞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지, 여운홍의 백과사전 기록에서는 그가 경신학교만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근대 언론 기록을 보면 미국에서 유학한 여운홍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그의 백과사전 기록에서처럼 서재필 김규식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위 배재학당 관련 기록을 보면, 미국에서 서재필 김규식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인물이 여운홍이 아니라 배제학당을 졸업한 여운형임을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1919년 8월 16일 신한민보 (기사제목 : 국민회 내지 대표원 여운홍)

여원홍2.JPG


위 기사는 우스터대학을 1918년에 졸업한 이후의 여씨의 행적입니다. 그가 1919년 상해 프랑스 조계에 도착하였다는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서 려운홍이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왜적의 무리한 수색으로 곤란을 겪었다는 내용은, 같은 시점, 사진이 올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기사의 반절이 잘려나간 다른 신한민보 기사의 려원홍( msn010.gif 꿍따리샤바라 msn010.gif 7번. 려원홍 상해 국민회 대표 관련 기사 참고)이라고 일컬은 인물의 행적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런데, 그 기사와 이 기사의 차이점은, 국민회 내지 대표원 려운홍은 김규식에 대해서 각하라고 호칭하고 있고 편지 말미에 000올림이라고 적는 등 매우 깍듯이 대하고 있는 반면 국민회 대표 려원홍은 "대사"라는 호칭으로도 불리고 있으며 국제연맹에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으면 한국은 일본에 대하여 독립전쟁을 시작하리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점, 또 일본이 공화국이 되어야 할 당위성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 등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또 려운홍은 상해에 도착하였을 때 임시정부 내의 파벌싸움을 보고 실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려원홍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도달함은 국민회의 사명과 전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함이다." 라고 못박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일이분


             



B. 신한민보 1913년 11월 21일 

려원홍 국민회입회.JPG


위 신한민보 기사를 참고해보면, 여운홍이 미국에 도착한 직후 한인 국민회에서 반 회원들과 지식을 교환하며 세계의 형편을 들으며 연설의 능력을 길렀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이때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실제로 후일 연설을 하면서 정치활동을 한 것은 동생 여운홍이 아니라 여운형이었습니다


또 동생 여운홍의 기록에 그가 프린스턴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또한 기독교계 학교를 나오고 성경 강론회에서 열심을 발한 여운형의 신앙 행적과 일치합니다.  또 위 백과사전의 여운홍의 기록에서는 그가 우스터 대학에서 무슨 과목을 전공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고, 1917년 당시 기록으로 영어가 서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미국 우스터 대학에서 공부한 여운형(여운홍)은 우스터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위 배재학당을 나온 여운형 역시 실제로 영어를 아주 잘했다고 합니다. (여운형의 백과사전 기록에서는 그가 1914년 중국 난징 금릉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여운홍이 우스터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신한민보 1918년 6월 20일기사>

여운홍 졸업.png



 

  제일 첫번째 1920년 11월 4일 신한민보의  "상해한인학교 교장 여운홍" 부분은 더 이상합니다. 배재학당을 나오고  미국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30대 중반의 여운형이 교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중퇴하고 돌아온 그의 동생 여운홍이 30살도 안된 나이에 상해한인학교 교장을 하고 있다뇨! (참고로 저는 NEW FACE에서 여운홍이란 이름이 "가이제르 수염을 뻣치고  청수한 눈망울을 굴리며" 연설을 하던 여원홍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위 상해한인학교는 인성학교를 말하는 것으로, 인성학교는 지금으로치면 초등학교 정도.  당시 인성학교 재정이 어려워 상해임시정부의  부속기관으로 인성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성학교의 교장은 상해 임시정부의 대표가 당연 승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위 인성학교 교장 자리를 놓고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상해임시정부를 이끌던 여원홍이라는 인물과 또 다시 한번 이름 대결을 하게 됩니다. 


또 백과사전에 등장하는 여운홍은 일본에서 유학중인 김성수와 교제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김성수는 동아일보사와 관계가 있는 인물로 실제 동아일보 통신원을 지낸 인물은 여운홍이 아니라 여운형이었습니다.


문제는 도대체 우리나라 1910~20년대에 신한민보와 국민보 ,독립신문에서는 왜 이 세 사람의 이름을  사이에 두고 이처럼 혼란스러운 일들이  자꾸 반복될까 하는 부분입니다. 


...............................................................................................................................


다음 이야기가 "웨딩 드레스( Wedding Dress) "편에서 이어집니다.



2017.10.28


정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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