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8

      

    

      2013년 9월 1일 사민본 논평

 msn010.gif<1980년 광주... 평범한 시민들을 국가 전복세력으로 내몰게 된

     "광주 사태 북한국 개입설"의 진실은 무엇인가?>msn010.gif 


   에 대한 해답이 오늘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계엄군 발포 전 시민무장 문서는 조작극"..침묵 깬 경찰 (SBS 2017.10.11)

     http://v.media.daum.net/v/20171011205507220?rcmd=rn

전두환.png
전두환 2.png
 
전두환2.png
전두환3.png




    2012년 6월 10일

육사 사열식.JPG
아래 사진은 (1987년) 6.10 민주화 항쟁 당시의 사진입니다.

6.10 민주 항쟁.JPG
610민주 항쟁.JPG

이와 같이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기념일인 6월 10일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의 초정으로 육사를 방문, 생도들의 사열을 받았다는 것은 보통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래는 버그 먹은 전두환 육사 사열 논평입니다. 꼭 한번 들어가보시기 바랍니다. 

● 전두환 등 5공 인사들의 자랑스런(?) 육사생도 사열


  (2012년 5월 10일) 전두환 등 5공 인사들의 자랑스런(?) 육사생도 사열




 위 동영상에 이어지는 ● 전두환 "대통령 7년씩 두 번 하려고 했지만..."  ● "이명박전두환"" 등의 동영상도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아래는 전두환 육사 생도 사열과 관련한 국방부 논평입니다. 


 ●  국방부 “전두환 육사 사열, 정치 쟁점화는 안돼”

msn010.gif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476 msn010.gif

● 아래는 쿠데타에 대한 합창의장의 개인적인 소견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신해혁명의 두 주역이자 중화민국 최초 대총통 손문과 부총통 여원홍의 사진입니다. 


     여원홍 손문 사진.JPG



아래 내용들은 "나의 노래"편의 "GIVE IT TO ME"와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아래 기사는 동아일보 1923년 6월 16일 조곤의 쿠데타 관련 기사입니다. 상단 제일 좌측의 "차회 대총통은 조곤씨 유력"이라는 제목 하에, 쿠데타로 여원홍 총통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 직례파(대표, 조곤) 라는 기사가 첫 머리에 등장합니다. 


조곤 쿠데타(1923년 6월 16일 기사).JPG


무척 신기한 일인데, 조곤이 군사 쿠데타로 중국 대총통이 되던 시점도 6월 10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쿠데타에 동원된 무기는 비행기였고요.


비행기.JPG 


                                         


매일신문의 조곤 관련 기사에서 1923년 5월 30일, 비행기 4대가 출동했다는 기사 제목이 검색이 되는데, 그 이후 6월 10일 자로 조곤 대총통설이, 그리고 그 다음날인 6월 11일자로 여원홍이 쫓겨났다는 기사가 차례로 뜹니다.


비행기4대.JPG


위 매일신보 1923년 5월 24일 기사를 보면 조곤씨는 피선무자격이라는 기사 제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기사에서 비행기 4대 출동 기사가 등장하죠. 그리고 그로부터 10일 후인 6월 10일, 아래와 같이 뜬금없이 조곤 대총통설이 신문기사에 등장하고 그 다음날 북경에 계엄령이 발포되고 여총통이 쫓겨났다는 설이 신문 기사에 등장합니다. 


여원홍 출분설.JPG


이후 비행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동시에 서구의 비행기 제작 기술도 큰 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아래는 그 다음해인 1924년 2월 10일 동아일보에서 취재한 중국 각계파의 비행기 보유대수 입니다. 


비행기수.JPG


장작림 40대. 조곤 40대. 오패부 20대, 손문 17대...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인 1922년 2월 22일자 아래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일본의 섭정왕 전하라는 호칭의 인물이 동경으로부터 서쪽으로 내려오는데, 20여대의 비행기가  떠서 공중 호위를 하였다고 합니다. 


비행기 20여대.JPG


중국의 직례파 조곤이 쿠데타를 위해 총 40대의 비행기 가운데 4대를 가동시켰던 점을 감안할 때, 일본 황실의 인물이 동경에서 서쪽으로 날면서 무려 20여대의 비행기를 자신을 호송하는데 이용하였다면 당시 일본은 중국의 각 계파들이 보유한 비행기 대수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조곤

    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중국 전역에서  반 직례파, 반 쿠데타 운동이 격심하게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 봉기가 여기저기서 일어나자, 과연 쿠데타 정권이 들어설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지나 정계가 분기점에 놓이게 되었다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조곤파가 무기를 운송해오고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는 것입니다.   


계엄.JPG


아래는 동아일보 1923년 10월 12일 기사로,  조곤이 참으로 얼굴 두껍게도 중국 신해혁명 기념일에  총통에 취임하는 취임식을 거행하고 또 동시에 조곤 헌법(일명 차오쿤 헌법)을 반포합니다. 


손문 전쟁선언.png

위 기사에 등장하는 차오쿤 헌법의 제1조항을 보면, 중화민국은 영원히 통일민중국으로 할 것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전두환 역시 쿠데타에 성공한 이후 통일된 한국을 열망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두환 통일.JPG



그런데 위 기사를 보면, 조곤이 총통 취임식을 거행하기 이틀 전인 10월 8일에 손문이 조곤 토벌을 선언하였다고 합니다.  



기사 내용을 참고해보면 쿠데타를 일으킨 조곤을 토벌하는 것이 손문의 북벌의 요체가 되고 있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일인테. 1925년 손문이 죽자 터무니없게도 손문의 후임을 자처한 장개석이 손문의 뒤를 이어 북벌을 하겠다면서, 엄하게 북방의 조선인이었던 장작림의 정권을 붕괴시키시키는 데 전력투구하죠. 


문제는 장개석이 세운 정권이야말로 조곤 쿠데타 세력과 연계된 파쇼 정권이었다는 사실은 아래 동아일보 1935년 8월 12일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이 되는 내용입니다. 그의 정치적 목표는 강력내각을 조직하고 파쇼정치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파쇼 정치를 가능케하는 강력 내각 조직은  일본 황실 인맥들이 모여 만든 정우회 소속 극우 정치인들이 목표로 삼는 정치 이념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 아래 장개석 관련 기사의 우측의 기사는 그보다 2년전인 1933년 6월 10일 동아일보 기사로 정우회 소속 정치인들이 전국 동지들에게 "강력 내각을 조직하라"는 격문을 보냈다는 기사입니다.)



장개석 파쇼.JPG 정우회.png



위키백과의 정우회에 대한 설명입니다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9A%B0%ED%9A%8C

 

1번. 정우회(政友會)1900년 일본에서 결성된 보수 정당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를 줄여부르는 말이다.

2번. 정우회(政友會)는 이완용1910년 조직한 합일병합 찬성 단체이다.

3번. 정우회(正友會)1926년 서울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운동 단체이다. 

 ..................................................................................................................................................


1번. 정우회(政友會) 19009월 이토 히로부미를 총재로 하여 결성된 정우본당의 약칭이라고 합니다. 1921년 하라 다카시가 암살된 이후 다수가 탈당하여 정우본당(政友本黨)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미츠이 재벌과 가까웠고 그중 정우황지회는 최강 우익단체라고 합니다.

 

2번. 정우회(政友會)이씨왕가가 한일합병 이후 1번. 정우회(政友會)의 핵심 회원이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3번. 정우회는 비록 한자는 약간 다르지만, 1,2번 정우회와 발음이 똑같습니다. 공산주의 운동 단체인데 특히 일본 공산당과 연계되어 있어 보입니다.

 




위 위키백과 기록을 참고하여 보면 1926년을 전후하여 일본 공산당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동아일보 통신원 출신 여운형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합니다. 


아래는 1925년 2월 15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기사 제목 :  조선의 독립과 적화를 위하여 협력하기를 중국 왕걸씨와 협정 후 북경에 가서 <카라한>씨와 선전비를 협의, 여운형씨 러시아대표회견>


조선의 독립과 적화.JPG


이 시점

         은 조곤이 쿠데타 성공으로 집권을 하고 있는 시점으로. 중국의 대총통을 지낸 여원홍이 총통 직인의 행방 때문에 일본 고문실에 갇혀 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여원홍이 일본 고문실에 잡혀 있다는 조선신문 기사가 등장하기까지,  손문은 조곤 토벌을 준비하면서 쿠데타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각 민족이 일어나야 한다며 유세를 하고 다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원홍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이번에는 여원홍의 정치적 근거지인 상해까지 가서 "쿠데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각 민족이 힘을 합해야 한다."고 유세를 하며 여원홍이 나설 것을 촉구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원홍이 잠잠하자 이번에는 일본까지 찾아가게 됩니다. 손문이 북진이라는 큰 전쟁을 앞두고 군사 행동을 수개월째 유보하면서 마침내 적국인 일본 땅까지 밟게 된 이유는 바로 언론에 보도된 기사들 때문인 듯합니다. 


                소리쳐


                




먼저, 쿠데타로 총통 자리에[서 쫓겨난 여원홍은 위 1923년 6월 16일 동아일보에 적힌 내용처럼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다 관자놀이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저는 솔직히 정말 여원홍이 자살을 시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원홍은 정치인이었습니다. 권총 자살 시도를 할 만큼 이 상황을 엄중히 보고 있다는 시그널을 국민들에게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여원홍이 이자성에 의해 북경이 점령당한 후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명나라 시기의 전제군주는 아니라는 거죠,  목숨을 바쳐서라도 중화민국의 헌법을 지켜내야 한다는 절박한 심경을 드러낸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래는 조곤이 총통직에 취임하기 전인 1923년 9월 15일 기사입니다. (기사 제목 : 여원홍 조곤의 야망파괴 역설)


여원홍 남하1923년 9월 15일.JPG


위 기사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여원홍이 상해에서 각성의 대표자를 초대한 후. 그가 상해로 내려온 이유로 '조곤씨는 무력(武力)과 금력(金力)으로써 상당한 지위를 획득코저 하는 바 조곤이 성공하게 되면 전국에 병란(兵亂)을 보게 될 터이니 평화를 위하여 저들의 야망을 파괴치 아니할 수 없으며 또 목하의 급무는 각 방면의 노력으로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진술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각 대표는 '정부의 조직은 중대 문제임으로 신중히 고려한 후에 회답할 터'이라고 대답한 후 산회하였다더라."


이후 조곤이 총통직에 취임한 직후인 1923년 10월 25일  아래 동아일보 기사 제목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여원홍은 북벌을 협의하기 위해 광동으로 내려가게 되죠. 당시 광동 정부의 최고 수령은 손문이었습니다. 신해혁명 당시처럼 손문과 손을 잡고 중국 남쪽에 별도의 공화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아래 기사입니다. 광동으로 가고 있는 줄 알고 있던 여원홍이 갑자기 일본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연이어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에서는 여원홍이 일본의 휴양지인 장기의 별부에 도착했다는 기사들로 도배를 합니다. 


여원홍 도일.JPG


위 기사 중 1923년 11월 12일 동아일보의 "여원홍씨 장기 상륙" 기사를 아래와 같이 캡쳐하였습니다. 기사 제일 윗단 우측 기사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 누차 도일(渡日)을 전하던 전 중국대총통 여원홍씨 일행은 토요일 오전 7시 반 동양기선 코레아환(丸/ 배)으로 장기에 입항한 바 일행은 제2부인과 종복등 9명인데, 전부 일본이나 중국인의 거짓이름을 사용하여 마중나온 세관장 이하의 환영을 받고 상륙한 바, 일행은 재팬 호텔에서  요기를 하고 오후 1시에 자동차로 장기역에 이르러 1시반 출발 열차로 요양지 별부로 향하였는데, 일행의 주택은 삼정(미츠이)물산 장기지점의 간선(幹旋)으로 별부 구지정 여관을 빌려 사용하기로 하였다더라."


여원홍 장기.JPG


위 기사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드리면, 광동에 신 정부를 꾸리겠다며 광동으로 내려가던 여원홍이 급작스레 방향을 틀어 일본으로 건너가 극우정당인 정우회와 매우 밀접히 연계된 일본 극우 기업 미츠이 재벌이 운영하는 요양지에 투숙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1년여 지난 시점인 1925년 2월 1일 여원홍이 장기의 일본 고문실에서 곤죽이 되어 있는 모습이 언론에 등장하기까지, 그는 일본에서 두번째 부인과 여유롭게 휴가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어왔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편 현재 백과사전 등의 기록에 의하면 여원홍은 부정선거를 저지른 조곤 일파에게 선거에서 진 뒤 자신의 거처인 천진에서 실업에 종사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와 같은 기록은 현재 중국 신문에서 여원홍을 평가하고 있는 내용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24년  9월경 쿠데타 세력을 몰아내는 북벌을 결행하기로 재차 삼차 결심한 손문은 마지막까지 여원홍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건너가서는 안되는 일본 땅까지 건너가게 됩니다.



 너 때문에                                                                                 가지마가지마


    


벌써 일년


   



아래 기사들은 손문이 북벌 선언, 북벌 결행 등등 수개월간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 하면서 끝내 북벌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일본까지 건너가게 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손문이 북벌 결정을 내린 것은 1923년 9월 조곤의 쿠데타가 성공한 직후 입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여원홍은 신 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손문이 있는 광동으로 남하한다는 기사가 언론에 등장하죠. 여원홍은 광동으로 남하 도중 갑자기 행로를 변경해 일본으로 가버리게 됩니다. 이후 여원홍이 일본 장기 휴양지에서 제2부인과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만 동아일보 등의 기사를 통해 보도될 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무려 1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손문은 여전히 북벌을 하지 못하고 북벌하겠다는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아래 기사는 조곤의 쿠데타 이후 1년이 지난 시점의 기사들로 이 시점에 손문은 북벌이 시기를 잃을까 초조해하며 반 광란 상태에 놓여있다는 제목의 기사까지 등장할 정도로 북벌을 서두르고 있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수개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똑같이 북벌 북벌만 외칠 뿐 여전히 실행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문 북벌 1.JPG


손문 북벌 2.JPG


손문은 이 시점에서 "인민과 힘을 합하리라"며 2번이나 선언을 하고 있고, 또 북벌을 위해 광동을 떠나 샤오관본영으로 출발했다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한편 각 신문에서는 중화민국에 동란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임을 보도하기 시작합니다. 


손문 북벌 3.JPG


그로부터 며칠 후 손문은 북벌 단행과 함께 광동 주민에 대하여 비장한 포고문을 또 발표합니다.  손문은 당시 만난 일본 통신원에게 "직례파는 1개월 안에 소멸할 것이다."라는 엄포까지 놓게 됩니다. 이 직례파는 쿠데타로 권력을 강탈한 조곤 일파를 의미하는 것이었죠. 


손문 북벌 4.JPG


그런데, 손문이 북벌을 위해 막 광동을 출발하였다고 한 기사가 등장한지 한달이 지났는데도 손문은 북벌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중국 동북방 조선인 장작림으로부터 군자금을 조달하고 있다는 기사만 내보냅니다. 


손문 북벌 5.JPG


아울러 손문의 북벌은 장작림 단기서 등 유력 군벌들과 중국의 제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천진으로 북상한다는 기사로 바뀝니다. 동시에 중국에 통일 기운이 농후하다는 기사가 등장하는데, 이 와중에서도 손문은 여전히 (직례파에 대한)북벌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손문 북상.JPG  

손문 북벌 6.JPG

손문 북상 7.JPG

그리고 그로부터 또 한달이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손문은 북벌을 위해 광동을 출발하는데, 그가 도착한 곳은 여원홍이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상해였습니다. 손문은 천진에 배를 타고 가기 위해 상해로 갔다고 변명을 하는데, 그  다음의 그의 행보를 보면, 그 말은 거짓이었음이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한편 상해에 도착한 손문은 "삼민주의를 실행할 시기이다"는 담화를 하였는데, 그 때 돌연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비명횡사할 뻔까지 하죠.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손문 상해.JPG


손문 상해 1.JPG


손문은 저격까지 당할 뻔한 위험을 무릅쓰고 상해에서  "황색인종이 단결을 해야할 때"라고 성명을 내놓고 또 연설을 하기도 합니다. 그 끝에 손문은 상해를 출발해  조선으로 갈 의향이 있음을 밝힙니다. 그는 급작스레 조선을 방문하는 이유에 대해 "동양민족이 단결해야 할 때"라면서 성명서를 통해 역설하기도 합니다.  


손문 상해2.JPG


결국 손문이 상해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간다면서 간 곳은 일본의 장기였습니다. 일본의 장기는 그로부터 1년 전 동아일보 기사에서 여원홍이 제2부인과 종복을 데리고 투숙하였다고 보도한 여관이 있는 곳입니다.  그는 장기에 도착하여 일본과 중국의 제휴 통감, 동양민족의 단결을 고창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또 오국(오색기가 의미하는 중국의 다섯부족을 의미)이 일치단결로 서로 도와야 한다는 연설을 합니다. 또 지나는 지나인이 다스려야 하고 외국의 원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연설을 하기도 합니다.


손문 장기.JPG


그런데 일본 장기에 도착한 손문이 그 다음으로 들른 곳은 신호였습니다. 그가 조선으로 가려고 한다면, 굳이 일본 장기에서 일본 신호(神戶)로 이동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신호는 일본의 남단에 있는 도시죠. 조선으로 향하는 배를 타려면 북쪽 바닷가로 가야 맞는데, 왜 남쪽 바닷가에 있는 도시인 신호까지 가서 머무르게 되었을까요. 기사를 보면 당시 신호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손문이 신호에까지 건너와 헤매고 있는 모습이 매우 불편하게 느껴졌던 듯합니다. 손문이 신호에 온 것을 반대하는 중국인들이 손문 배척의 불온문서까지 만들어 뿌렸다고 합니다.  


일본 신호.JPG 




손문 신호2.JPG

손문 신호3.JPG   

                  


저도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갔지만, 손문이 중국 상해와 일본 장기를 거쳐 조선을 방문한다면서 다시 방향을 바꿔 일본 남쪽 바닷가의 신호(神戶)까지 가서 헤매게 된 이유는 여원홍의 행적과 깊은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원홍과 신호를 검색해보니 아래와 같은 기사가 검색되고 있었습니다. 




손문 신호1.JPG   손문 신호.JPG


여원홍이 장기에 도착한 이후,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시점에 매일신보에 "여원홍이 일본 신호(神戶)를 시찰하였다"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아마도 이 기사를 끝으로 여원홍의 행적이 묘연해진 듯한데, 장기에서 여원홍을 만나보지 못한 손문은 언론에 보도된 여원홍의 마지막 행적지인 신호까지 찾아가 여원홍이 어디선가 웃으며 자기를 맞으러 튀어나와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생각에 여원홍은 신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하하던 중 조곤 일파에게 납치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가 비록 총통 자리에서 쫓겨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총통의 직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가 총통 직인을 가지고 남하하여 손문과 손을 잡고 신정부를 세운다면 그 신정부가 중국 정부로서의 정통성을갖게 될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조곤 일파는 나름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참고로 여원홍이 일본 장기에 상륙한 시점은 1923년 11월 12일인데, 그로부터 열흘 정도 지난 시점인 1923년 11월 23일 동아일보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등장합니다. 

(기사 제목 : 남방해군매수책 / 매수비 백이천만원지출 결정 )

남방해군.JPG 당시 여원홍은 남하하다가 코레아환을 타고 장기에 상륙했다고 하는데, 만약 그가 자기 발로 직접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강제로 끌려서 일본까지 가게 된 것이죠.  중국의 대총통을 배에 실어 일본까지 실어갈 정도라면 해군의 막강한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였을 것이란 점은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남방파의 해군을 매수하는 문제에 대해 이미 중국은행과의 양해가 성립되어 매수비 백이천만원을 지불하기로 결정이 되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


 "나의 노래"사이트의  msn010.gif 그때 또 다시 msn010.gif로 이어집니다. 


2017.10.17

정윤경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8 진압 아닌 학살 군 문건 속 5·18 참혹한 정황들 첨부 파일
정윤경
9 2017-10-19
37 사형제 ,공소시효 논란 당신의 생각은? 첨부 파일
정윤경
9 2017-10-18
Selected 광주시민무장 문서는 조작극(조곤 쿠데타 관련 모음 추가) 첨부 파일
정윤경
33 2017-10-11
35 2017.10.3 개천절 특집 단군 공화(共和) 첨부 파일
정윤경
58 2017-10-02
34 9.29 개돼지 파동(사법부 개혁을 위한 정책적 제안들) 첨부 파일
정윤경
65 2017-09-29
33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
정윤경
99 2017-09-18
32 꽃피는 봄이 오면
정윤경
89 2017-09-18
31 오늘 헤어졌어요
정윤경
86 2017-09-18
30 사민본 정책사항(1차, 2차, 3차, 이후 추가사항) 모음입니다.
박삼
13245 2012-11-17
29 <Announcement> The mail address of People's Democracy Center(Chairperson: Suhksam Park) has been changed.
박삼
13330 2012-06-07
28 <공지사항> 계룡시 소재 사람민주주의본부가 2012.6.5 자로 영구폐쇄되고, 잠정적으로 안산시에서 활동을 계속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박삼
14018 2012-06-07
27 <공지사항> 박석삼(박삼) 트윗 모음이 전자책(ebook)으로 발간되었기에 2012. 5. 27 일자로 워드파일 게시를 중단합니다.
박삼
12035 2012-05-27
26 <공지사항> '박삼 3,300 트윗 모음' 제1권, 제2권이 전자책(ebook)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첨부 파일
박삼
7985 2012-05-21
25 <서약서> 당원용 첨부 파일
박삼
8470 2012-03-01
24 <서약서> 창당준비위원회 발기인용 첨부 파일
박삼
8663 2012-03-01
23 <모집공고> 사람민주당(사민당) 창당준비위원회 발기인 및 당원 모집 공고 첨부 파일
박삼
7520 2012-03-01
22 사람민주주의본부등록증 첨부 파일
박삼
20078 2012-02-28
21 <4.11총선 공지사항> 사민본 연대 무소속 출마자들에 대한 선거지원 관련 첨부 파일
박삼
7219 2012-02-18
20 <서약서> 무소속 후보자용 첨부 파일
박삼
7925 2012-02-18
19 <12.2.17 발표문> 국민과 19대 국회의원 후보자들께 4.11 총선에 대한 사람민주주의본부 입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박삼
7892 2012-02-17
첫 페이지 1 2 끝 페이지
Tag List
목록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