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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2 (08:57:54)



             월량대표아적심



             



 

                                                     

                                                     단군 공화(共和)



   대 신문 기록을 보면단군을 단군 황조(皇祖)라 부르기도 하고 단황(檀皇)이라고도 부르는데그중에는 단군 조선은 왕조가 아니라 공화국이었는 해석을 내놓는 글이 있어 무척 흥미를 끕니다.물론 그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신문은 단재 신채호가 주필로 있던 권업신문인데이 권업신문의 주장은 단지 신문 사설 차원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격을 규정짓는 핵심 정치 이론의 기본 틀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일제 강점기간 내내 단군 영정은 마치 한국 임시정부의 상징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데아마도 단군 조선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이 중요한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또 단군 공화론을 펴고 있는 권업신문을 발행한 권업회의 인사들이 상해 임시정부의 중요 요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여기서는 

            조선의 개조, 단군과 관련한 근,현대 신문 기록들을 발췌하는 것으로 올해의 개천절을 기념하고자 합니다. 

 

먼저 103일이 개천절로 정해진 내막과 관련한 기사들을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

 

 

● 권업신문 191368음력명절과 한인

 

  " 우리 동포는 역사 사상이 박약하여 33일을 제비오는 날로 알고 고구려의 하늘에 제사하던 날인지는 모르고 103일은 떡 먹는 날로만 알고 3국 고대에 국조께 제사했던 날인지는 모르며, 8월 추석을 달 둥근 날로만 알고 신라의 가배절인지는 모르고 103일은 단군에 제하는 날인지 몰라 일년 열두달 안의 소위 명절이라는 것을 다만 해가 지고 달이 오며 가을이 가고 봄이 와서 우주의 자연으로 되는 시절의 경계를 즐겨할 뿐이요, 우리 조상이 특별한 조건으로 창립한 기념절이 있는지 모르니 실로 가속하도다."



참고로 10월 4일 추석을 맞아 가배절과 관련한 신문 기사를 발췌하여 보았습니다가배절에 대한 당시 사람들 생각은 온 가족이 모여서 차례를 지내는 날이라는 생각보다는 마을 단위 동네 단위로 사람들이 모여서 놀이를 하고 노래와 춤을 추며 흥취를 돋우는 날이라는 의식이 더 강했던 듯합니다.

 

<권업신문 1912-09-29 - 가배절 >

 

오늘날 추석절은 가배절이라 이름하였나니 거듭 일천구백여년 전에 신라 유리왕이 그 딸들로 하여금 육부 안의 여인을 거느리고 칠월 보름날부터 시작하여 날마다 일찍이 모여 길쌈을 하다가 팔월 보름날에 와서 뉘가 잘하고 뉘가 잘 못하였으며 뉘가 많이 하고 뉘가 적게 하였는가 상고하여 못한 자가 반드시 음식을 차리고 나은 자를 청하여 사례하며 노래와 춤과 그 외의 백 가지 재주를 다하였으니 이를 가배라 하였으며 이에 어떤 여인이 회소곡(會蘇曲/일명 회악(會樂)’이라고도 한다가사는 전하지 않으며그 관련 설화가 삼국사기』 유리왕 9년조에 전한다이 때 길쌈 경쟁에서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會蘇會蘇(회소회소)’라 하였는데그 소리가 구슬프면서도 아담하였으므로 뒷사람이 그 소리를 인연으로 노래를 지어 회소곡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이란 노래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으니 이것이 가배라. 

 

<국민보 1913-10-15>

 

해항(현 러시아 블라드코스크 위 해삼위 지역)에 거류하는 우리 동포들은 전래하여 오던 가배절을 지키는 고로 금년 음력 八月 十五日에는 신한촌에 있는 한인 각 사회와 한민학교에서 다 각각 업을 쉬고 아침 8시부터 시작하여 학생운동회를 실행하고 저녁에는 권업회종람소에서 재미스러운 연극을 배설하여 나머지 흥치를 도왔다 함. 



 

● 독립신문 19211111개천절력

 

  " 오늘은 단군께서 우리나라를 처음 세우신 건국기념일 이라 이날에 대하여 옛적에는 어찌되었던지 근세에 와서는 우리 일반국민이 이 건국기념일을 국경일로 알고 지낸 일이 적었다가 1919년 독립을 선언한 후 금년까지 3년동안 국경일로 지냅니다.... 

  단군이 건국하신 후 단군조는 물론이고 그 뒤를 계승한 역대의 모든 나라들이 다 단군의 건국위업을 기념하기 위하야 월일을 택하여 성대한 양식을 거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역대로 그 기념의 명칭과 의식과 혹 월일의 차이는 불무하나 단군을 건국시조라 하야 그를 잊지 않음이 건국을 기념하는 것이라 생각함은 역대의 공통된 정신으로 볼 수 있으며 또 그를 상제라 천제라 천왕이라 천군이라 하야(우리 선민의 생각이 철리에 맛고 안맞음은 제외로 하고) 교조로 신봉하여 기념함도 사실이었습니다. 명칭으로 말하면 삼한의 천군제라던지 부여의 영고회, 예의 무천회, 기씨의 보본제, 고구려의 동맹회, 신라의 태백 산사, 백제의 사중제, 발해의 단계축, 요의 단수제, 금의 장백산책, 고려의 삼성사제, 조선의 숭령전제 등이 이명동체의 기념이올시다. 

  의식으로 말하면 삼한, 부여, , 고구려 등 모든 나라에서는 전국의 공동거행으로 삼한은 대표자를 선출하여 국읍에 제하고 그남아 세 나라는 민중이 회집영축하었으며 기씨, 신라, 발해, 요금, 고려, 조선 등 모든 나라는 임금이 친제하거나 혹 강향대제하였습니다. 

  월일로 말하면 삼한, 예 고구려, 요 등 모든 나라는 10월로 하였고 백제는 4중제로, 고려 조선은 춘추로 하였고, 그남아 몇 나라는 어느 달에 하였는지 아직 잘 알 수 없으나 역대에 10월로 함이 가장 많이 드러난 사실이요, 또 우리나라 최근까지 전래하는 풍속을 보면 전국이 공통하여 10월달이라 하여 이달에 초1일이나 혹 초3일에 삼신제, 제석제 등 여러 명목으로 기념하는데, 그 유래를 고찰하면 삼신은 환인,환웅,환검(즉 단군)이오 제석은 삼신을 불가에서 부르는 별칭인 즉 기실은 다 단군을 기념함인데 옛적에는 국조교조라 하야 기념하던 국경일이 근세에 와서는 한 귀신 섬기는 음사(淫祀 /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냄)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101일과 3일 중 어느 날이 적확한 일인가 제 생각에는 1일보다 3일이 그날인 듯합니다. 

  103일은 쳘수로 말하더라도 여러 가지 곡육과 과실을 다 거둔 뒤에 경제상태가 1년 중 제일 좋은 때라 일반국민이 비교적 심리도 편안한 때요, 또 일기도 그리 춥지 아니하여 생각나기 좋을 만한 때인 즉 역대로 이 103일을 국경일로 지난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날을 정하는 것이 무방하겠는데 하물며 역사에 그만한 증거가 있음이겠습니까... "

 

 

한편

       1919년 3.1 독립 선언과 함께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단기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와 같은 상해 임시정부의 전통은 해방 후 1948년 제정된 헌법에도 반영됩니다.

 

● 국민보 1948106- 단기연호 법률안 통과

 

   " 백65표로 통과 / 단군기원 연호 채용과 관련 /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 본법은 공포일로부터 시행된다."

 

 

그리고 1961년 개정법률안에 의해 단기 연호를 버리고 지금의 서기 연호를 사용하게 되는데 단기 연호를 버리게 된 이유가 당시 신문 기사에 아래와 같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 국민보 1961-11-29 - 공용 연호로 서기 사용

 

  " 본국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현재까지 사용해 오던 우리나라의 공용 연호인 단기를 서기(그리스도 강생기준)로 바꾸려는 계획 하에 연호개정 법률안을 공개했다. 원래 단기 연호는 4281(1948) 925일 법률 제4호로 공포되어 오늘날까지 공용되어 온 것인데 국내 문서에는 단기를 쓰고 있으나 국제문서에는 서기를 씀으로써 환산의 번거로움이 생기고, 또한 역사 등 교육에 있어서 연대에 관한 개념이 혼란이 생긴다는 것 등이 이번 개정법안의 이유인데 이에 대한 사회 각계 인사들의 의견 중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두 분의 의견을 들어본다면,(사학과 유홍렬교수의 의견)누구나 찬성해야 할 일. 단기 사용은 혼란만 일으켜 서기를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것이다. 단군이라는 신화적인 존재를 두고 기원을 책정한 것부터가 언어도단이었다. 우리가 단기 운운하기 시작한 것은 1914년부터라고 생각되지만 단기를 사용함으로써 교육상으로도 공연히 이중으로 부담을 주는 것이 되서 조금도 이로운 것이 못 된다. 원래 현 중학교 교과서에도 서기를 사용하고 있으며 다만 초등학교 교과서에만 단기를 씀으로써 혼란만 가져왔었으므로 이번 조치는 찬성치 않을 수 없다.(국문학자 이숭령 교수 의견)과학적 근거가 박약. 광신적 애국주의는 버리자. 나는 이를 원칙상 절대로 찬성합니다. 새로운 건국을 계기로 우리가 쓸데없는 복고주의를 버림으로써 국제성을 띠어 국민들에게 참신한 기풍을 주입시키는데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한편, 우리나라 역사의 기원인 단기 4294년이라는 것이 과연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느냐는 것도 의심이며, 신화에 그 근거를 둔 것이니 국민이 전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것도 엄연한 사실인 만큼 차제에 광신적 애국주의는 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연호를 서기로 사용함으로써 국제성을 지닌다는 것은 조속한 후진성 극복에도 자극을 줄 것이며, 환산의 번거로움이 제거되어 제반 사무에도 능률이 향상되리라고 볼 수 있으므로 이번 입법 처치를 환영 찬성하는 바이다."

 

 

  시 몇몇 지식인들이 앞장 서서 단군 연호 사용에 대해 매우 신랄한 비난을 하고 있는 모습도 등장하는데, 그들이 무슨 주장을 하였든, 단기 연호 폐지가 국민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진 가장 주된 이유는 편리성때문이었습니다. 또 위 기사에서 일부 학자들이 "단기 연호가 1914년부터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단기 연호가 최초로 신문사의 발행 날짜로 사용된 것은 아래와 같이 권업신문 19136월 8일의 일이었습니다.


단기 연호.JPG



그런데 그 이전인  19131월의 첫 기사를 보면, 발행 일자로 러시아력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1면의 첫머리에 그 해의 단기 연호를 공지하고 있습니다


단기 연호1.JPG


조선왕조실록 태종 16년 6월 1일 기록을 보면, 당시 집현전  대제학이었던 변계량이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의 무진년이다"라고 하여 그 정확한 시점을 꼽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단기 연호를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만들어내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만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연호라면 그것이 대한민국 헌법에까지 반영이 될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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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와 단군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일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신문 기사들을 발췌하여 보았습니다.

 

● 독립신문 192004-27 축하임시정부문

 

  " 아신대한임시정부시여 삼천여리 금수강산 근화수성에 4천유대 신성하신 단황태조누적음덕으로 기초 삼아 이천만중도덕천민진량재로 열성혈상에 홀연특립한 아신대한임시정부시오..."

 

단군황태조의 음덕을 기초 삼아 대한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는 내용입니다.

 

 

● 권업신문 191301-05 단군기원

 

 " 아아 이것이 망상이 아니니라. 일본인의 눈에는 대한민국이 없지만 우리 한인의 눈에는 대한국이 있을지니라. 서양인의 입에는 대한국이 없지만 우리 한인의 입에는 대한국이 있을지니라. 세계지도에는 우리

한국 그림이 없지만 우리 대한인의 가슴에 그린 대한국은 있을지니라만국역사에는 우리 대한국 기록이 없지만 우리 한인의 마음에 기록한 대한국은 있을지니라. ... 금년에 사천이백마흔여섯 살 먹는 대한국

뿐 아니며 명년에 사천이백마흔일곱살 먹는 대한국 뿐 아니라 장래 억억 만만세 영원무궁한 대한국이 있을지니라. 만일 이러한 생각이 없으면 대한인이 아니니라. 나라 이름이 없어진 후라도 그 나라 사람만 없

어지지 아니 하였으면 없어진 이름이 다시 회복되나니..."

 

● 권업신문 1913- 03-09 - 흥업회 발기

 

  " 슬프다 동포 동포여, 어떤 백성이 나라가 없으며 어떤 사람이 조상이 없으리요. 묻노니 동포야 우리도 나라가 있으며 우리도 조상이 있는가. 우리가 중국 사람도 아니며 우리가 서양 사람도 아니며 우리 조상이 황제(黃帝 / 중국 사람이 시조로 떠받들고 있는 신화적 인물)도 아니며 우리 조상이 아담도 아닐지라. 그러면 우리가 참 나라와 조상이 없는가, 이것이 우리의 맑은 정신으로 한 번 생각할 만한 일이라... 슬프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부여 민족으로 나라가 어찌 없으며 조상이 어찌 없으리요. 금옥 같은 대한은 우리의 나라며 신성하신 단군은 우리의 조상이라..."

 

 

● 권업신문 1913420국민적 생애

 

  " 같은 민족이 같은 정신과 같은 주의로 연락 단체되어 같은 통치관계에 있음을 이름하여 가로대 국민적 생애라 하느니라. 상고시대에는 인류는 적고 토지는 많음으로 그때에는 나라마다 각각 내 나라란 구역을 애써 다투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는 가운데 백성은 다만 등 덥고 배부르면 만사태평으로 지내었으나 인류가 점점 번식함과 함께 인류의 생존이란 것이 큰 문제가 되어 마침내 제 민족끼리 서로 단결되는 힘이 굳건하여 내 민족을 서로 도와주고 다른 민족을 배척하며 내 나라의 한치 만한 땅이라도 다른 민족이 건드리면 이에 총과 칼로 서로 다투어 몇 천 몇 만 명이 피를 흘리게 되었으며, 또 한걸음 나아가 약한 민족의 고기를 강한 민족이 먹으며 어리석은 민족의 물건을 지혜 있는 민족이 빼앗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러는 이것이 도로이 천연한 공리가 되었도다. 이와 같이 민족의 생존경쟁이 극도에 달하여 하룻밤을 자고나면 각금 딴 세상이 되는 오늘날에 우리 대한민족은 어찌하여야 생존을 유지할고. 이에 대하여 우리는 한마디 말로 대답하되 국민적 생애를 하여야 하리라 하노라. 곧 대한민족은 어디까지라도 대한국민적 생애를 하여야 하루라도 생존을 유지하리라 하노라. 오호라. 국호가 없어진 지 이미 년이 되어 통치기관도 없고 행정기관도 없어 각국 영지로 유리표박하는 민족으로 국민적 생애를 하라함이 혹 어리석은 자의 우스운 말 같지만은 결코 그렇지 않으니 법률상 한국은 없어졌을지라도 정신상 한국은 없어진 것이 아니요, 형식상 한국은 없어졌을지라도 실질상 한국은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니니라. 과연 대한국민의 뇌 속에 정신상 한국과 실질상 한국이 없어지기까지는 대한국민적 생애를 함에 넉넉하다 하노라. 저 유대(이스라엘)민족을 보라. 나라가 망한 지 이미 천년이나 가까이 왔으되 오늘날까지 유대(이스라엘)국민적 생애를 하여왔으므로, 유대(이스라엘)국 말을 보전하여 왔으며 유대국(이스라엘) 글을 보전하여 왔으며, 유대(이스라엘)국민의 윤리를 보전하여와 혼인을 하여도 유대(이스라엘)국 사람이 아니면 안하며 실업을 하여도 유대(이스라엘)국민 전체의 이익이 안되면 안한 고로 나라가 망한 지 근 양천년이나 오래도록 유대(이스라엘)국의 국수를 능히 보전하였으며 유대(이스라엘)국민의 이름으로 능히 생존을 유지하였을 뿐더러 오늘날 세계에 돈많은 민족을 세자면 유대(이스라엘)민족이 몇째 안 가게 되었으니 누가 오늘날 정신상 유대(이스라엘)국이 없다 하리오. 오호라. 오늘날 우리 민족의 현상을 돌아보면 제일에 일정한 종지가 서지 못하여 무슨 일을 하면 과연 민족에게 유익하며 무슨 일을 하면 과연 민족에게 해가 되는지 분별하지 못하여 입으로는 대한국민이노라하면서 정작 일을 할 때에는 대한국민에게 해되는 일을 하는 자가 많으며 아울러 일정한 방향을 정치 못하여 이 길로도 달아나며 저 길로도 달아나 정작 대한국민의 나갈 길은 찾지 못하며, 제이의 같은 민족으로 연락 통일하는 힘이 부족하여 교육을 하여도 각각 제 의견대로하여 교육의 정신통일을 볼 수 없으며 실업을 한다하여도 농사하는 자는 제 힘만으로 땅을 파 제나 먹으면 만족한 것으로 알며, 장사를 한다하여도 각각 제 돈닢으로 각기하여 겨우 호구지책이나 도모할 뿐이요, 아직까지 몇 백만 몇 천만의 자본을 합하여 회사 하나라도 완전히 조직한 것을 못 보았으며 아울러 대한국민다운 덕의심은 날로 박약하여 제 민족 사이에 서로 의지하며 힘을 합하여 민족전체의 이익을 도모할 기약이 만무한 동시에 생활 곤란은 점점 극도에 달하여 목하에 당장 참혹한 현상을 당하게 되었도다......  

  우리는 대한민족으로 생존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대한국민적 생애를 하여야 하리라 하노라. 그러면 과연 대한국민적 생애를 하려면 어찌하여야 될고. 첫째, 대한국민다운 고상한 품격을 힘써 보전하여 남의 종노릇하기를 좋아하지 말라. 아무리 잉글리(영국) 말을 잘하고 잉글리(영국) 의복으로 단장을 잘 할지라도 사천년 혈통으로 내려온 대한국민의 얼굴은 변치 못할 것이니 누가 잉글리(영국) 사람이라 하리요, 대한국민이 흥하면 너도 같이 흥할 것이요 망하면 같이 망할 것이니라. 둘째 대한국 말과 대한국 글과 대한국 역사를 존중히하여 힘써 보전하라. 그리하여야 대한민족으로 다시 살날이 있으리라. 셋째 정신을 한가지로 하여 한 길로 같이 나가라. 그리하여 교육을 하든지 실업을 하든지 종교를 신앙하든지 어천만사에 변코자하여도 변치 못할 대한국민의 이름으로 나는 어디까지든지 신성한 대한국민으로 난 정신과 마음으로 힘과 뜻을 합하여 민족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죽든지 살든지 서로 의지할 제 민족끼리 모여 안으로는 서로 도와주며 밖으론 장애를 서로 막아 물건을 사려면 비싸더라도 제 사람의 물건을 사서 한 푼 이익이라도 내 민족의 속으로 들어오게 할 것이니라. 넷째 대한국민의 이름으로 모인 단체는 반드시 머리 위에 니어 깊은 사랑을 주라. 그리하여야 조금일지라도 대한국민적 통일정신을 유지하리라. 이와 같이 하여야 오늘날 민족경쟁이 불 일어나듯 성하며 조수같이 밀려들어오는 격렬한 경쟁 중에서 같이 생존을 유지하는 동시에 정신상 대한국과 실질상 대한국도 없어지지 않으리라. 그리하면 또한 법률상 대한국과 형식상 대한국도 돌아올 날이 있으리라. 역사가 같고 혈통이 같고 언어가 같고 글이 같은 민족으로 정신과 주의를 한가지로 연락하여 국민적으로 살아감이 무엇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리요, 참된 애정은 가까운 데로부터 먼저 나는 것은 천리 인륜에 떳떳한 일이니라. 힘쓸지어다. 대한국 민족이여 대한국민으로 대한국민의 살림을 회복하여 대한국민다운 일을 힘쓸지어다. "

 

● 권업신문 19121110- 단군 대황조 성탄절

 

  " 단군은 우리를 살라고 크나큰 집을 주셨는데 무정한 우리들은 그 은혜를 잊으며 단군은 우리가 가지라고 많기나 많은 문명제도를 전하였는데 무심한 우리들은 그 풍토를 잊은지라. 그리하여 밥먹을 줄은 알되 단군을 모르며 그리하여 옷입을 줄은 알되 단군은 모르며 그리하여 남의 시조는 알되 우리 시조 단군은 모르며 남의 성인은 알되 우리 성인 단군은 모르며 그리하여 십삼도 안의 공자 사당은 건축이 굉장하지만 평양의 단군전에는 이끼가 한뼘이며 그리하여 오백년 내의 누대왕릉은 수호가 지엄하지만 강동의 단군릉은 봄풀이 세길이었나니...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우리가 다 단군의 자손인지를 알면 동포사이에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이 나리라. 우리가 다 단군의 유민인지를 알면 나랏일에 대하여 분발할 정신이 생기리라. 단군의 창조하신 문명이 어떠한지를 알면 우리가 사천년래 신성한 민족으로 어찌 오래 남에게 굴복하리요.. 잊은 단군을 다시 생각할만하니, 정성으로 형식을 대신하며 공경으로 희생을 대신하여 대황조께 드리고 성탄절 이날부터 새사람이 될지어다."

 

 

위 

   기사에서 "단군은 우리를 살라고 크나큰 집을 주고 단군은 우리가 가지라고 많기나 많은 문명제도를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 큰집과 많은 문명제도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 역시 근대 신문 기사들을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 권업신문 1912 11- 10 - 단군대황조 공덕의 각방면 (대황조가 국가를 건설하여 주고 대황조께서 종교를 창립하여 우리에게 줌.)

 

  " 단군 대황조가 누구시며 무슨 공덕이 있는가. 단군 대황조가 우리의 조상이라고 그리하는가. 단군 대황조가 우리 나라의 고대성인이라고 그리하는가. 그뿐만이 아니라, 만일 단군 대황조가 아니시라면 우리가 옷 입을 줄 몰랐을 지며 우리가 밥 먹을 줄 몰랐을 지며 곧 우리가 각기 라는 이름자도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우리가 대황조를 이같이 존봉하며 대황조 성탄일을 이같이 기념함이니라. 믿지 않는 이 있거든 나의 이야기를 잠깐들을 지어다. 제일은 단군 대황조가 국가를 건설하여 우리에게 줌이니 상고에는 우리 민족이 처음 번식할 때에 사람을 해치는 범과 표범들은 산림에 가득하고 오늘 일본과 같이 우리를 침노하는 원수에 숙신이니 예맥이니 하는 종족은 사면에 벌어져 있었나니 이때에 조금만 잘못하면 우리가 짐승의 밥이 될지며 조금만 잘못하면 우리가 다른 종족의 어육이 되었을 뿐인데 다행히 거룩하신 대황조가 나서서 팽오란 사람으로 산림을 개척하여 범과 표범같은 적을 쫓으며 여수기란 사람으로 장수를 삼아 숙신과 예맥을 쳐서 항복하고 북에서 흑룡강(헤이룽강) 연안부터 남으로 삼남에까지 우리 땅을 만들고 다른 종족은 이에 범치 못케 하시고 공고케 나라의 기초를 세우사, 사천이백사십여 번까지 오도록 우리 대한사람이노라 하게 하니라 

  제이는 단군 대황조께서 종교를 창립하여 우리에게 줌이니 상고에는 동서양 황백인종을 물론하고 다 금수보다 얼마 낫지 못하게 살아남고 무지하던 것이라. 그러하더니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이 종교를 창립하고 이 세상의 무지한 사람들을 인도하여 완전한 사람을 만들었는데 혹은 불을 위하며 혹은 소나 뱀같은 것을 위하며 혹은 잡귀를 위하였나니 이는 다 다신교(多神敎), 가장 고상한 종교는 하느님 하나만 믿었나니 이는 일신교(一神敎).  히브리 민족이 일신교는 저희들이 홀로 창립한 것이라고 세상에 자랑하나 우리 역사를 상고하면 부여도 하늘만 믿고 삼한도 하늘만 믿고 고구려 신라도 하늘만 믿어 일신교의 행한지가 오래였는데 그 최초의 창립하신 이는 대황조시라... ... 공경과 정성으로만 하늘에 제하여 회부루(히브리)민족의 희생으로 하늘에 제함보다 더욱 고상순결하며.. 예수교도 한 종교며 불교도 한 종교며 회회교도 한 종교라... 오늘 세계에 있어 장단을 다투지만 이에 집의 장처와 특점은 거금 사천년년 백산 단목 아래서 한 풀무에 녹여서 써본 나머지인들을 아는 자가 뉘뇨.

 


● 독립신문 192231- 태평양회의에 제출한 대한민국의 요구

 

  " 한인은 종교적 민족이라 고래로부터 경건진성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불미불혹한 초절한 관념이 전래하여 한인의 진생명이 이에 있음을 일본인은 간파하고 방법을 다하여 종교를 압박하기에 전력하나니라."

 

  신문 기사 글은 한민족의 유일신앙이 작금 독립 운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며,  아래 기사들은 우리 민족이 사용하고 있는 한글과 단군 황조와의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 한민 19361130- 건국기원절 후 감언(소감)

 

망국노(망한 나라의 노비)의 탈을 쓴 채 적의 말발굽 밑에서 또다시 건국기원절을 맞은 우리는 뜨거운 눈물이 아직도 피묻은 옷깃을 적실 뿐이다. 이웃나라 중국은 이 꼴을 당하지 아니하려고 이제는 전국이 일치하여 적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강한 적과 싸우는 그들은 도리어 생기가 발발하다. 나라 없이 잘사는 방법을 신 발명한 아라사(러시아)도 이제는 그 실패를 자인하고서 조국을 사랑하라 역사를 알라하면서 고함을 친다. 슬프다 스물일곱 해 동안을 망국의 한을 품고 쓰라린 맛을 겪어본 우리로써 만일 사람의 맘이 있다면 나라가 없어야 잘살 수 있다는 잠꼬대를 또 할까보냐. 한국 두 글자를 원수같이 여기며 태극 국기까지 넝마 속에 묻어 버릴까보냐. 돌아보건대 우리나라를 세운 이도 찬란케 꾸민 이도 망케 한 이도 다 우리의 조상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라를 다시 세우며 다시 찬란케 꾸밀 이는 오직 우리뿐이요,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부터 망국노의 탈을 뒤집어 쓴 우리 청년들이다. 우리가 나라에서 받은 은혜는 비록 적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나라에 갚을 것은 가장 많다. 우리는 큰 짐을 짊어졌으니 어느 겨를에 지나간 이들의 공과인들 논란할 수 있으랴. 또 그것이나 논란한들 무슨 이익이 있으랴. 설령 그들의 허물을 밝힌다 하더라도 빼앗긴 나라가 제 스스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의 공로를 찬양한다 하여도 웃음이 나올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더러운 망국노의 탈을 벗기 위하여 목숨이 붙어있는 최후 일각까지 원수와 사생을 결단할 것뿐이다. 

  망국노의 탈을 벗으려면 그 탈을 쓰게 된 원인부터 알아야겠다. 물론 그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나 남을 높이고 나를 업신여기며 남의 것은 까닭 없이 좋아하고 내 것은 덮어 놓고 내버렸다는 한말로써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 보라 요순은 추앙하여도 한배검은 알지도 못하며 신지의 문자는 한문이 아닌 까닭에 자취도 없어지고 이순신의 철갑선은 당껏이 아닌 까닭에 그대로 삭아버리고 세종대왕의 한글은 지체가 낮아서 암글이 되고 말았다. 이 결과는 나라까지 망하게 하였나니 이러한 예는 부지기천기만이다. 말이 이에 이르매 일우장탄을 금할 수 없다. 한 나라의 망함이 어찌 우연하랴. 새 나라를 세울 큰 짐을 짊어진 우리는 건국기원절을 맞을 때에 먼저 이따위 비열한 사상부터 퇴치하자. 나를 알며 내 정신을 지키자는 것을 더욱 굳게 결심하자. 우리는 조상들의 역사를 중국 문헌(文獻)에서 찾아냈지마는 우리의 자손은 우리의 역사를 아라사(러시아)나 일본의 문헌에서 찾게 되지 아니하도록 만들어 주기를 결심하자.

 

   기사 글에 등장하는 신지의 문자와 관련하여서입니다.

 

신지씨가 어떤 문자를 전하였는지는 정확히 알기는 힘드나, 기사 글을 참고해보면 이 문자는 한문과는 완전히 다른 문자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신지씨는 환웅천황이 거느린 무리의 하나이며 치우씨(蚩尤氏)· 고시씨(高矢氏)· 주인씨(朱因氏)와 아울러 인간 366사를 다스렸는데 처음으로 문자를 발명했다고 합니다.

 

한편 아래 기사를 보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 문자는 세종 대왕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원래 부여족이 사용하던 26자의 자모음을 세종이 개량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권업신문 뿐 아니라 기타 여러 신문 기사에서도 누차 등장하는 내용인데, 가령, 우리가 흔히 만주어로 알고 있는 만주족의 표음문자 역시 그들과 한데 어울려 살았던 부여족이 사용하던 26자 자모음의 영향을 많이 받은 문자가 아닌가 추정됩니다. 이 부여족의 26자 자모음이 신지씨가 발명한 문자와 어떤 상관 관계가 있을 법도 한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로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 권업신문 1913213국문사자기의 원조

 

   " 부여민족의 가진 비0문이 진실로 어떠한 글이뇨. 26자의 자모음이 극히 주밀하여 국어의 처음에 짝이 없는 절묘한 문자요, 부인이나 어떤 아니라도 가히 하루 아침에 배워 알지니 민지(民智)를 개발함에 가장 민첩한 기관이라. 이 글이 세종의 개량을 얻은 뒤에는 몇 백년을 00하였다가 민족의 사상이 팽창한 오늘을 당하여 부인 여자의 수중에서 뛰쳐나와..."

 

이처럼 단군이 후손들에게  나라를 세워주고, 많은 문명을 전하여주었던 부분도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지만, 특히도 일제 강점기 독립 지사들이 단군 황조를 시조이자 천제로 떠받드는 가장 큰 이유는 전 세계로 흩어져 유리표박하고 있는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유일한 구심점이 바로 단군 황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독립신문 1922-11-30 - 건국기원절경축

 

  " 본월 21일은  우리 국조단군께서 건국하신 날임으로 상해 거주 우리 일반동포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 교민단의 주최로 동일 하오2시 동지삼일당에 모혀 성대한 경축식을 거행하였는데... 박은식씨는 단군께서 우리를 생하고 육하고 교하던 그 은덕과 우리 민족이 유시호 결렬되여서는 삼국으로 분열되어 외모를 수한 일도 있고 단결되어서는 일개의 여진으로도 중국의 황하 이북의 전토를 병하야 대금()을 건설한 일이 있는 역사를 술하고 다음에 조완구씨는 단조의 그 바탕과 그 빛으로 우리 민족이 이만치라도 번영하엿슴은.. 안창호씨는 .. 우리가 다 한 단조의 자손인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서로 미워하지 않을지요 우리의 독립이 아직 완성되지 아니하였으나 완성하리라는 희망을 가질지니...


 

   은식이 죽기 전 마지막 유언은 민족의 단결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민족의 단결만이 잃어버린 나라를 찾을 수 있는 동력이 된다고 믿었던 듯합니다. 이런 이유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단군을 한민족 단결의 절대적 구심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던 듯합니다.


그러면 당시 독립 투사들이 떠받들어 모시던 민족의 구심점 단군 황조는 후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인식되고 있었을까요? 아래는 현재 우리나라 부여박물관에 소장 중인 조선시대 평양 숭령전에 모셨다던 단군 영정이라고 합니다.


단군.JPG

 

위 평양 숭령전에 모셔졌던 영정이 가장 오래 된 영정이라고 하는데, 이 영정이 언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권업신문에서는 평양 숭령전의 영정이 고대로부터 전하여지던 것이라 합니다. 그와 관련된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 권업신문 19121215단군대황조어진촬영

 

평안 숭령전(단군사당)이 고대부터 봉안하여 온 단군 대황조어진으로

 


또 아래 기사를 보면, 평양 숭령전의 영정 액자 옆에는 가미고이 도가오소라는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 문자가 신지씨 문자로 적혀진 문자가 아닌가 추정될 뿐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위 숭령전 영정에는 영정 액자에 같이 적혀 있다는 고대 문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 독립신문 192005-06 국민이 오래 니졌던 이날 - 가미고이 도가오소

 

 " 신규식 선생을 대하여, 


 

<위키백과> 


신규식(申圭植, 1880~1922)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독립운동가충북 청원군 출신대한제국에서 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경술국치를 맞자청나라의 손문과 천치메이 등 중국 동맹회 간부들과 친교를 맺어 중국 동맹회에 가입한 뒤 신해혁명에도 참여. 1912년에는 신해혁명계 인사들과 친교를 맺기 위해 신아 동제사를, 그 해 7월에는 '동주공제'(同舟共濟)라는 뜻의 동제사를 조직이 단체에는 총재 박은식을 비롯  김규식과 신채호 및 조소앙 홍명희 여운형(동아일보 기자 및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고해방 후 일본을 방문하여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도저히 이해못할 글을 남기고 돌아온 친일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이 당시 나이가 25세에 불과하였습니다또 근대 신문 기록을 보면이 시기의 여운형은 부인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학원에 유학 중에 있었고그곳에서 국민회 당원으로 가입정치 활동을 하기 시작합니다또 후일 이승만 지지 세력이었던 구미위원회 소속으로도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따라서 1912년 신규식과 동제사에 함께 참여했다고 알려진 여운형이란 이름은 신규식과 같은 군인 출신으로 신해혁명 성공에 큰 공을 세운 여원홍으로 수정되어야 할 듯합니다.) 조동포 장건상 등이 가입해 있었다이들은 1917년 7월에 ‘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1918년 (여원홍이 단장으로 있던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지원하였고이듬해인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자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어 1921년 11월 3일에 손문이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천절의 유래를 물으매, '금일 절 315일은 한배검이 승천하야 오신 곳으로 다시 도라간 날이오, 개천절은 즉 세상에 내려오신 날을 기념함이니 이 두가지 명절은 삼국시대까지는 만한(滿韓)에 산재한 한배의 자손들이 팔관제, 동맹, 무천, 천군제, 대단 등의 이름으로 성대히 모여 죽하하고 기념하였습니다. 그렇지마는 이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불행이 민간에서는 전혀 이날을 망각하고 아모 의미도 모르고 아들 점지하여 주는 신을 위한다 하야 이날을 제한 일이 있고... 왕실에서는 평양숭령전에 년년이 제한 일이 있었을 뿐이며...'  

  이에 선생은 벽상에 걸린 단군의 어진을 가르키면서 이것이 즉 숭령전에 있던 어진을 모사한 것이외다. 좌우에 있는 글은 단군의 덕을 기리는 고대의 글이니 가미고이는 높은 은덕이란 말이오 도가오소는 길이 사모한다는 뜻이외다... "

 

  기사를 통해 중국 신해혁명에 가담했던 군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이 그의 집에 평양 숭령전의 단군 영정을 모사한, 좌우에 고대 문자가 아로 새겨져 있는 단군 영정을 벽에 걸어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평양 숭령전에 모셔졌다는 단군의 영정이 어쩌다가 좌우의 고대 문자마저 사라진 채로 지금의 부여 박물관까지 가게 되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위의 단군 영정이 지금의 한반도 부여 박물관에 기탁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보면 지구를 거의 반바퀴를 돌아야 될 상황이 됩니다

 

 

현재 부여 박물관에 소장중인 위 사진의 단군 영정 원본은 원래는 부여 장정마을 천진전이라는 곳에 봉안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해방 전 신문 기사에 의하면 독립운동가 강석기 선생이 평양 숭령전에 있는 단군 영정을 자신의 고향인 부여 장정마을로 가져왔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의 아들인 강진구(1884~1957)1920년경 아버지로부터 단군의 영정인 천진(天眞)을 물려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 평양 숭령전의 단군 영정은 조선이 망하고 상해에 임시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평양에서 상해 의사당 내로 이전이 된 것이 분명한 듯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어천절을 맞아 단군 영정 앞에서 예를 갖추고 찬송을 하였다는 그 영정이 바로 평양 숭령전의 단군 영정 원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에 앞서 위 단군 영정과 관련된 재미있는 사진을 하나 올려드려볼까 합니다. 위 단군 영정에서 단군이 입고 있는 옷의 옷고름과 관련된 부분인데, 양쪽 옷고름의 길이가 매우 짧으며 길이도 거의 비슷하여 마치 리본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중국 후베이성 센닝시 퉁산현 구궁산무량수선사( 九宫山无量寿禅寺 )에 있는 불상인데,  불상이 입고 있는 옷에 위 단군 영정에서 보이는 것과 매우 비슷한 모양의 옷고름이 채워져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 세계에서 이와 같은 옷고름이 채워진 옷을 입고 있는 민족은 조선인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아래 불상은 조선인이 세운 불상일까요?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부처는 원래 입고 있는 전통적인 의상이 있는데, 뜻하지 않게 부처상에 저고리 옷고름이라니...  무척 신기롭게 느껴집니다. 


                          

                       九宫山庄严的佛像 ( 구궁산장엄적불상 )   msn010.gif   http://www.panoramio.com/photo/89770618  msn010.gif

        

https://www.google.co.kr/maps/place/%EC%A4%91%EA%B5%AD+%ED%9B%84%EB%B2%A0%EC%9D%B4+%EC%84%B1+%EC%85%B4%EB%8B%9D+%EC%8B%9C/@29.408273,114.682932,3a,75y,304h,90t/data=!3m8!1e2!3m6!1s89770618!2e1!3e10!6s%2F%2Flh4.googleusercontent.com%2Fproxy%2FOW-oe-Zzm8Ee65W9PhGK6Kk52cqNgNb4CQ4B8EOWaT084VhE9Ck8hTOVIz3w6yV7sQYHwC1iIgjwX4ziXyy1qKCLDqpWpg%3Dw203-h270-k-no!7i2592!8i3456!4m13!1m7!3m6!1s0x31508e64e5c642c1:0x951daa7c349f366f!2z7KSR6rWt!3b1!8m2!3d35.86166!4d104.195397!3m4!1s0x342f2e59643e64bd:0xa082e928044d822b!8m2!3d29.8418351!4d114.3223572


       구궁산장불상.JPG 구궁산.JPG  


예전에 구글 사진들을 검색하며 중국 구경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위 불상의 옷고름 사진을 보고 하도 신기해서 캡쳐해놓은 것입니다. 조선인의 한복은 옷고름의 길이가 긴데 비해 위 불상의 옷고름은 매우 짧습니다.  또 옷고름이 동여매어진 위치가 조선의 한복의 옷고름에 비해 상당히 아래 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을  단군 영정과 비교해보니 단군이 입고 있는 옷의 옷고름의 길이가 이와 비슷할 뿐 아니라 옷고름의 위치도 거의 비슷해보입니다.  어쩌면 이 불상의 조각자는 조선인으로, "단군이 곧 부처이기도 하다."는 자신의 믿음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도 가능해집니다.           


                  널 너무 사랑해서


                   



일제 강정기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단군 영정을 얼마나 신성시 하였느지에 대해서는 아래 '나의 노래'의 '깊은 밤을 날아서' 편에서 자세히 설명드린 바 있습니다. 도대체,  대한민국 독립 지사들과 상해 임시 정부에서 국가처럼 떠받들던 평양 숭령전의 단군 영정을 어떻게 한 개인이 마음대로 자신의 고향으로 가지고오고 또 이를 자기 자식에게까지 물려줄 수 있었을까 하는데 대한 궁금증이 커지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원래는 상해 임시 정부에 위의 단군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단군 영정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통성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었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되면 뜻밖에 모든 의혹이 쉽게 풀리게 됩니다.  또 강석기란 인물이 이 단군 영정을 장정마을로 옮겨왔다고 하는데,  단군 영정 이전의 배경은 독립운동가였던 강석기보다는 그의 고향인 장정 마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을 듯합니다장정마을은 강석기, 강철구, 강일, 강성모, 강일구, 강병국 등 여섯 명의 애국지사를 배출한 마을이라고 하는데, 한 마을에서 여섯 명의 애국지사가 배출된 곳은 전국에서 장정마을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여 장정마을에는 강씨들이 무척 많이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조선 근대사를 보면, 중국 땅에도 부여가 존재했고 장정 마을과 이름이 비슷한 장족 마을이 지금도 중국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의 부여족 묘적 자치구가 그 곳입니다.


장족 자치구.png


 

위 지도를 보면 A 부여 묘족 자치구 아래에 C 좡족 자치구가 있습니다. 광시(광서) 좡족 자치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충칭시 서북쪽의 장족 자치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위 지도 상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중국 지도를 보면 장족 자치구를 한자로 강(姜)족 자치구라고 적고 있습니다.  성씨 강()을 현대의 중국 발음으로 소리내면 찌앙, 취앙 소리가 나는데, 결국 장족 자치구 혹은 좡족 자치구는 우리 말로 치자면 강씨들 집성촌이라는 뜻이 됩니다. 중국의 문화 혁명 이전 중국의 충남 서남에 있는 좡족 마을에는 강씨들이 대거 모여 살던 집성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먼저, 어쩌다 강씨들이 이처럼 중국 남서부쪽에 대거 모여 살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는 중국의 성씨의 역사를 연구해보면 어렵지 않게 해답이 나옵니다.

 

중국 정사인 사마천 사기에는,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 황제가 치우와 탁록에서 큰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탁록'이라는 황하 유역의 땅을 놓고 치우와 황제가 서로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치우가 패하게 되어 중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죠.  여기서 황제가 중국 한족의 조상으로 떠받들어진다면 치우는 구려족의 지도자이며 현재의 먀오족(묘족)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황제에게 패한 이후 치우 부족의 일부는 헌원에게 협조했고 일부는 여족(黎族), 일부는 묘족 (苗族)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 묘족은 지금의 양자강 유역으로 밀려나와 거주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중국 성씨의 역사를 보면 바로 이 치우의 성이 강씨라고 합니다. 환단고기를 앞세우는 역사가들은 이 치우를 단군의 조상인 환웅의 한 인물로 묘사하기도 하죠.

 

중국에서 문화혁명을 거친 이후 현재 장(좡)족 자치구에 과연 강씨 성을 가진 묘족이 얼마나 많이 남아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르겠지만, 그곳의 이름이 지금도 좡족 마을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근대까지만 해도 적지 않은 강씨들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근대 신문 기록을 보면 중국 양자강 이남 지역에는 C의 장족 자치구A의 부여 묘족 자치구 뿐 아니라, B의 계림 지역에도 조선인들이 꽤 많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계림에서 발행된 구망일보 ( 구망일보는 중국군, 일본군 간의 공방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37년 8월 24일 상해에서 창간되었으나, 상해 함락으로 인해 정간되었다가 1938년 1월 1일 D 지역인 광주에서 복간, 1938년 11월  광주가 함락됨으로써 정간되었다가 다시 계림으로 이동하여 1939년 1월 10일 복간되게 됩니다.. 구망일보사가 있었던 계림은 당시 문화 도시로 상해, 광주와 무한이 일본군에게 함락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있는 문화인들이 계림으로 몰려들었다고 함 ) 기사를 통해 확인이 됩니다. 

 

● 구망일보 193931

   

  " 3.1운동 20주년 기념일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오늘 내 눈으로직접 목격한 피비린내 나는 참극의 현장을 간략히 기록하여 오늘을 기념하고자 한다.

 

  나는 당시 학당에서 천자문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선생님은 나와 친구들을 계림산 (내가 다니던 학당에서 약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명산)으로 데리고 가셨다. 우리가 그곳에 당도하였을 때는 이미 부근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모여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은 평소와는 달리 매우 흥분되고 한편으로는 심각해보였다. 특히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한가운데 걸린 커다란 깃발(태극기)이 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 깃발은 내가 평소 자주 보았던 농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 70세의 노옹인 선생님은 주저없이 앞에나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선생님의 선창에 맞추어 사람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의 장엄한 외침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외침의 고저장단은 자연스럽게 행진의 보조를 맞추는 행진곡 역할을 하였다. 사람들의 함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떄 갑자기 무장한 왜경들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향해 사정없이 총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죽음도 두렵지 않은 듯 사람들은 계속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단 한명도 도망가는 사람이 없었다. 3.1운동이 나에게 남긴 인상은 분노와 참통한 기억뿐이었다. 3.1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난 뒤 나는 투쟁심과 복수심을 배웠다."

 

 

 ● 구망일보 193925.

 

  "1929년 광주 학생 시위 때 4만여명의 학생이 체포..."

 

 

당시 한반도 좁은 광주에 학생이 4만명이나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따라서 저 유명한 광주 학생 시위는 아마도 광동성의 D지역 광주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광주 지역은 서구의 신문명이 경쟁적으로 수입되는 지역이었고 향학열이 특히 강했던 많은 조선인들은 그곳에 자녀들을 유학을 보내 공부를 시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구망일보 1939624

 

  " 조선 의용대가 주최한 일본군 포로를 위한 다과회... 천여명에 가까운 군중이 난군사 강당을 가득 메워 조그마한 공간도 찾을 수 없었다. 탁자 주위로는 계림시 각계대표 1백여명이 앉아 있고 나머지 사람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서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다과회가 이처럼 성황을 이루리라고는 주최측도 전혀 예상치 못한 듯 하였다. ... 대만독립혁명당 대표 장일지도 참석... "

 

 

● 구망일보 1940321

 

  " 편제와 훈련을 마친 조선부녀복무대 일행 20여 명이 오늘 새벽 계림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중경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낙양에 도착한 뒤 본격적인 지원 공작을 진행할 예정이다." 


구망일보 

              기사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당시 계림시는 문화의 도시이기도 하였지만, 조선 의용대의 활동 근거지이자 독립 운동의 본산지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여 볼 때, 6명의 강씨 애국지사를 배출한 강씨 집성촌의 원래의 이름은 한반도에 있는 장정 마을이 아니라 중국의 서남부에 있던 장(강)족 마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더욱 짙어집니다.  문제는 어쩌다 평양 숭령전에 모셔졌던 단군 영정이 머나 먼 장족 마을까지 옮겨가게 되었을까 하는 점인데, 이 부분은 평양의 단군 영정 원본이 조선이 망한 이후 상해 임시정부로 이전이 되고,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하는 내내 임시정부와 운명을 같이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됩니다. 


<대한민국 독립기념관에 게시된 상해 임시정부의 이전 경로>

영정 이전.png

 


아래는 1943년 10월 31일 시점에서 중경대공보를 통해 확인되는 한국 임시정부와 단군 영정의 위치입니다.

목시1 1943 1031.png


한국 정부의 개천절 행사와 관련된 기사인데, 글자가 많이 흐려 잘 안보이지만 한국 임시정부의 개천절 기념, 그리고 숭령전이라는 단어와 국조를 기념한다는 글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기사 첫머리에 목시(木市)라고 적힌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결국 이 기사는 목시에서 만들어져 충칭 대공보에 보내진 기사라는 이야기입니다. 


목시.png

 

  

목시는 현재 중국의 충남 부여 묘족 자치구에 있는 시로 그곳(목시)의 대파(큰 고개)라는 단어가 위에서처럼 구글 지도에서 검색이 되고 있습니다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단군 영정도 같이 이전하던 중,  위 부여족 묘족 자치구의 목시에 이르러  천진전(단군 영정을 모시는 곳)을 만들고 그곳에 단군 영정을 모시게 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면 1943년 10월까지만 해도 중국의 부여땅 강씨 집성촌 인근에 안치되었던 단군 영정이 언제 어떻게 한반도 부여 장정 마을로 이전이 된 것일까 하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현재 영정의 소장자가 강규성 씨라고 합니다. 그는 20여년 전에 아버지(강현기)께서 부여박물관에 기탁했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현재 강규성이 이 영정의 소장자이기 때문에 이를 잠시 박물관에서 관리할 수 있도록 맡겨 둔 것으로 언제든 소장자의 뜻에 따라 돌려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국보급 문화재를 한 개인이 어떤 이유로 소장하게 되었는지도 석연치 않지만, 이를 평양 숭령전에서 장정 마을로 최초로 이전해왔다는 강석기 부자와 스스로 소장자임을 주장하는 강규석씨와의 관계도 명확하게 밝혀진 부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의혹이 가는 부분은 해방 후 신문 기사를 보면, 이 영정을 한반도 부여 천진전에 안치한 사람은 강씨가 아니라 이씨와 정씨였습니다.  아래는 영남일보 1946년 4월 11일 기사입니다. 해방 이후의 일입니다. 


 < 단군황조 천진 봉안회 발회 >


단군황조1946년 4월11일 영남일보.png


위 기사는 단군 황조의 천진(영정)을 봉안하는 회를 조직하였다는 내용으로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결같이 단군 한아버지의 피를 받아흐른 역사 찬연히 빛나는 유규반만년을 헤아리건만 일즉이 왜정 하에서 마음놓고 불러보지 못하던 한아버지를 이제 힘끗 불러보는 한편에 다시 우러 민족의 찬연한 고유 문화를 이 삼천리 강산에 굳게 굳게 세워야 할 것이다. 여기에 뜻을 같이한 동지들은 길이길이 단군한배님을 받들어 마음과 몸을 한배님의 본원으로 돌려 정결한 조선혼을 동방에 꽃피게 하기 위하여 단군 한배님 천진(영정) 봉안회를 발회하였는데, 역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이경희 / 부회장 정운일 김우식 / 이사 석문규 외 14氏 /  평의원 정운기 외 58氏 /  돈문(頓問 / 수시로 찾아뵙고 정성껏 모시는 사람)  이동루 "


이 회를 보면 이씨가 회장으로 주동이 되고 있고, 또 정성껏 모시는 주체, 즉 제사장도 이씨가 맡고 있는데, 그 외에 이사에 석문규를 포함한 14개의 성씨 대표, 그리고 평의원에 정운기를 포함한 58개의 성씨 대표가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씨 이외에 대략 72개의 성씨가 단군 황조 봉안회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단군 황조의 자손이 72개 성씨에 국한되는 것인지, 도대체 나머지 성씨의 단군의 자손들은 단군의 자손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자기들끼리 내부 결정을 지은 것인지, 느낌이 매우 이상합니다.  저들이야말로 단군을 음사(淫祀 /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냄)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좀 불쾌한 느낌까지  듭니다. 


어찌되었건, 해방 전에 중국 부여 강씨 집성촌에 안치되어 있던 단군의 영정이 해방 이후 이씨 왕족의 손을 거쳐 한반도 부여 땅으로 이전된 듯한데, 그 과정에서 이 영정이 어떤 누구의 개인 소장품이 되게 되었다면, 그것을 특정 개인이 소장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이루어져야 할 듯합니다. 


 

   지막으로 상해 임시 공화 정부의 핵심 정치 이론적 틀을 제공하고 있는 단군의 공화 사상에 대한 신문 기사를 발췌하여 보았습니다.

 

 

● 권업신문 1912 11- 10  - 단군대황조공덕의 각 방면

 

  " 단군 대황조께서는 공화정치를 창립하여 우리에게 줌이니 수천년 이전에 국가를 건보한 자를 보면 혹은 주먹으로 함에, 혹은 칼로 하여, 위력을 정의보다 앞세우며, 무기를 인도보다 먼저하니 제()라 왕()이라 간() 이라 징 이라 찰 이라 하는 자리는 악과 불의와 무도한 흉도 같은 여러 가지 구진 물건으로 쌓아놓은 곳이라... 조촐하고 깨끗한 것은 반점도 없느니라. 그러하나 우리 단군 대황조의 임금되신 역사를 보면 그 제일장부터 끝장까지 오직 거룩하고 장엄한 것 뿐이라. 고로 신인이 태백산 단목 아래에 내림에 백성들이 높혀서 임금을 삼았다 하였으니 대황조의 높은 도덕에 천하가 스스로 돌아옴을 가히 볼지며, 말년에 승하하심에 백성이 구월산에 사탑을 짓고 수천년을 제사하였나니 이도 또한 동서만고 제왕에게서 볼 수 없는 바라...

  대황조의 임금되실 떄에 이와 같이 국민공화의 선거에 맡기고 일호의 사의를 두지 않은 고로 그 여풍이 삼천년을 두고 상전되어 부여의 대신이 모두 공동의 선거로 되며, 제왕의 계통전수도 백성의 뜻에 위반되게 하면 곧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였나니 해부루와 금와의 일이 그 한 전례요, 고구려도 이와 같고, 해모수의 임금됨도 백성의 뜻이며, 온조의 임금됨에는 십신(열명의 신하)이 상의하였고 신라의 박, , 김 삼성이 서로 자리를 사양하여 왔나니 이는 다 단군 대황조의 하늘같고 바다같은 덕화 아래서 성질을 길러온 민족인 고로 폐없고 해없이 이 아름다운 정치를 수천년을 행함이라....  

  .... 희랍(그리스)과 로마가 귀족공화의 제도로 하였다하나 그 시기가 각기 수백년 뿐이라. 부여, 고구려의 삼천년에 비교할 수 없을 뿐더러 황제간의 권리 싸움에 피로 강을 이루어 그 신성한 이름을 더럽혔으며 지나(중국요순의 선위가 공화에 가깝다하나 그 일이 겨우 두 대 뿐이라. 신라 삼성의 구백년에 비교할 수 없을 뿐더러 요유수순야사(堯幽囚舜夜祀)의 의안(疑案)이 역사에 전하여 맏대가리에 호피를 씌우지 안하였는가. 하는 의심을 후인에게 주었도다. 이로 보라. 단군 대황조의 도덕이 과연 어떻게 높으며 가법이 과연 어떻게 엄정하뇨. 다만 애석한 것은 말세자손이 불초하여 나의 좋은 법을 버리고 지나(중국)의 전제정치를 수임함이니라. 지금 우리는 정치 무대에 명함도 못들게 된 민족이라..."



단군 조선의 상고사가 <조선 도교 이야기>란의 < 조선 도교로 본 조선 상고사 > 에서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7.10.05


정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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