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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1 (00:07:03)



오늘자 신문 기사네요 


   北 "평양서 고구려 벽화무덤 발굴…3세기 전반 축조" ( 뉴스1. 2017-09-20 )

       http://news1.kr/articles/?3106801  msn010.gif


       고구려 고분.JPG


 는 오늘 위 고분 사진을 보다가 1913년 2월 권업신문 기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올려드리겠습니다. 


1913월 2월 23일 권업신문 ( 제목 :  우리나라의 고적 )



우리나라의 고적.JPG


 

  인 공학박사 광여정 이란 자가 작년 가을에 충북경북 각 지방을 대략 두 달 동안에 돌아다니면서 한국의 사적을 조사하였는데 첫째강서에서 고구려 시대의 돌관을 파내었는데 넓이 두간높이 두 간 되는 고총에 화강석으로 만든 돌관 세 개가 있고그 중 두 개는 검은 바탕에 그림을 그린 것인데 모두 대략 一千 三백년 전의 물건이며 그 중 한 고총에는 동벽에 청룡서벽에 백호남벽에 출입문좌우에는 주작북벽에는 현무네 신을 그리고 천정에는 당초(唐草모양연화모양또 천인(天人)을 그림하여 매우 화려한데 동양 고대의 굉장한 미술품이라 하며,


권업신문 기사에 의하면 일본 공학박사가 충북, 경북 각 지방을 돌아다니다 강서에서 고구려 시대의 돌관 세개를 파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서지역의 한 고총에서는 위 뉴스1기사에 등장하는 고분과 비슷한 모양의 고분도 같이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위 캡쳐된 권업신문 기사에는 안보이지만, 기사의 뒷 부분에는 신라 유물들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는데, 그 내용을 참고해보면 위 고구려 고분이 발견된 지역은 경북이 아닌 충북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 권업신문에서는 고구려 고분이 발견된 지역을 또 "강서"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 신문에서는 강동이라는 명칭도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강동에 바로 단군릉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강동은  전통적으로 중국 양자강의 동쪽 지역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또 위와 같이 강서라는 명칭도 등장하는데, 이 강서 지역은 강동에 대비되는 단어로 양자강(장강)의 서쪽 지방을 일컫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면 위 충북지역과 강서지역을 지도상에서 찾아서 위 고구려 고분이 발견된 지역을 한번 찍어보도록 하죠.  


 강서 :한무제 때 전국을 13개 감찰구로 나누었는데, 이를 13부주라 칭하였다. 이때의 강서는 양주부에 속하였다. 왕망의 신시건국 원년에 예장군의 이름을 구강군으로 변경하였다. 후한, 함국, 진, 남북조 시기 군의 이름은 예장이었고, 군의 치소 이름은 남창이었다. 수 개황 9년(589년)에 예장군을 폐지하고 홍주를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여전히 남창현이었다 당 지덕 원년(756년)에 예장군의 이름을 장국으로 개칭하였다 당조 정관년간에 장강의 중하류지역에 강남도(江南道)를 설치하였는데, 서기 733년 당현종이 다시 강남동도(江南東道)와 강남서도(江南西道)로 나누었다. 강남동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변화를 거려 지금은 강소성, 안휘성이 되었고, 강남서도는 강서라는 이름을 계속 유지하여 예장을 대신하여 강서지역의 행정명칭이 되었다. ( 사기 외국전 역주 / 史記 外國傳 譯註)



강동 강서.png


위 지도는 양자강을 강동 지역과 강서 지역으로 나눈 것입니다. 나누어놓고 보니 강동 지역에 호북성(후베이성)과 강서성, 후남성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충칭시 북쪽 지역에 해당하는 충북 지역과 강서지역이 겹치는 곳에 고구려 고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다가~  고구려가 거기까지 내려가서 고분을 지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나게 됩니다. 


                 으 르 렁


                  



나중에라도 자세한 내용을 설명드릴 시간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위 강서 지역에 위치한 우한시(근세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한양으로 불렀던 곳)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볼 때, 매우 중요한 장소라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이 우한(무한, 무창)을 분기점으로 하여 중국의 충청과 전라도(호남지방/ 후난성) 그리고 경상도가 나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수많은 기록들에서는 바로 이 강서지역 언저리에 남한산성이 위치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남한산성은 삼남지역(충청, 전라, 경상)으로 곧바로 통하는 주요 관문이어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기록이 매우 여러차례 등장합니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의 남한산성은 여러가지 면에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과 일치되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보셔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그런데 위 지도에서 문제의 우한 지역 아래 위치한 센닝시(주황색 박스)에는, 그 유명한 삼국지의 적벽강이 위치해 있고, 그 옆의 빨간 박스에는 황주(黃州, 황산)이 위치해 있습니다. 


주황색 박스 안의 적벽대전지는, 중국의 삼국시대( 180년경 ~ 280년) 때에 위, 오, 촉 세나라가 무한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인 장소인데, 촉나라가 무한을 오나라에게 빼앗기면서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고 합니다. 

                                                                  <무한 시 아래 센닝시에 있는 삼국지 적벽대전 장 msn010.gif https://ssl.panoramio.com/photo/59807152 >

                                                                     

삼국시대.JPG 적벽대전.JPG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때에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큰 전투를 벌였던 곳이 황산벌입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전투가 660년 8월 20일 있었다는 황산벌 전투라고 합니다.


아래는 현재 우리나라 역사책에서 가르치고 있는 황산벌의 위치입니다.


황산.png


그런데, 황산벌 전투의 역사를 보면,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가 백제를 치기 위해 당나라 군사까지 끌어들였다고 하는데 도대체 지금의 논산에 있는 예전의 황산벌 자리라는 신양리, 신암리 등지에서는 중국의 당나라까지 가세한 수십만 대군이 격전을 벌일만한 장소를 아무리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백과사전에서 황산벌 전투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황산벌 전투 : 백제가 신라를 자주 공격하자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나,당 간의 동맹을 맺었다.  660년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 5만 명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3합하여 18만의 군사가 백제로 쳐들어갔다.-당연합군이 백제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자의자왕은 대소신료들과 대책을 논의한 끝에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옛 월왕 구천은 5천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용기를 다하여 싸워 국은에 보답하자"며 병사들을 독려했고과연 백제군은 사기가 올라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격파하였다.이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을 전장에 투입하니반굴은 힘껏 싸우다 죽었다반굴이 죽자 김유신의 조카인 좌장군 김품일은 16세의 아들 관창(官昌)을 시켜 선봉에 서게 하였다관창을 붙잡은 계백은 관창의 나이가 어린 것을 보며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라 탄식하며 돌려보냈다.신라군으로 돌아간 관창은 품일에게 간단한 인사만 한 후 또다시 백제군에 쳐들어 갔다결국 계백은 관창을 잡아 목을 베었다관창의 죽음에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덤비니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부하들과 함께 계백이 죽게 된다.

  



그 다음으로 황산벌의 정확한 위치를 규명하기 위해서 먼저 황산벌이란 명칭의 기원을 분석을 해보겠습니다.

 

황산벌은 황산 + 벌의 합성어인데, 여기서 벌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넓고 평평한 땅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벌이 되니까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이고 심지어 10만이 넘는 당나라 군사까지 끼어들어 대전을 벌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위 논산시의 황산벌이라는 부분의 지형을 가까이 접근해보면 아래와 같이 생겼습니다.


황산벌.jpg


 

실제 저의 경우 차를 타고 이 지역을 수도 없이 많이 왔다 갔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유심히 살펴본 지역이 바로 이 지역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의아심이 들었던 게, 어떻게 삼국이 이 좁은 곳에서 큰 전쟁을 치룰 수 있었을까? 그리고 당나라 군사가 여기까지 원정을 왔다면, 수군인가?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습니다.

 

<황산벌 오토캠핑장>


황산벌 오토.JPG  

 

이 지역에 사시는 분들께서 동의하실지 모르겠지만, 위 오토 캠핑장 등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일부 토지를 제외하고는 제가 보기에 그 곳은 대부분이 산이나 논, 밭이었습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산벌이란 명칭은 보이지 않지만 황산이란 지명이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동시에 발견되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한반도에서는 충청도의 황산벌이란 지명만 남아 있을 뿐 경상도에서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지명입니다.

 

우리가 알아보려고 하는 것은, 그 중 충청도 지역에 속한 황산인데,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충청도 공주목의 연산현과 진잠면이 황산과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충청도 연산현은 "원래 백제의 황등야군(黃等也郡)인데신라에서 황산군(黃山郡)으로 고쳤고고려에서 연산군(連山郡)으로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고, 진잠면은 원래 백제의 진현현(眞峴縣)인데신라에서 진령현(鎭嶺縣)으로 고쳐 황산군(黃山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한반도 충청도에서는 황산군에 속하는 위 연산면과 진잠면은 거의 이웃해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계룡산으로 인해 지형이 나뉘어 연산면()은 논산에, 진잠동은 대전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계룡산이 황산이 되어야 맞겠죠. 하지만 계룡산이 황산으로 불려졌다는 역사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 위 권업신문 기사를 참고할 것 같으면, 강서지역에서 1,300여년 전의 고구려 고분을 발견하였다는데, 이 시기는 660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였다는 시기와 얼추 비슷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만약 권업신문 기사 내용이 정확한 것이라면, 신라가 끌어들인 당나라가 차지하고 있어야 할 땅에 웬 고구려 벽화랍니까? 도대체 당나라와 고구려는 어떤 관계에 있는 걸까? 하는 또 다른 의문마저 불러일으키는 부분입니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퍼온 것으로 670년경의 당나라 지도라고 합니다. 


당나라 670.JPG 

 

고구려 신라 백제를 한반도 영역으로만 축소해서 역사를 바라볼 때에는 당나라가 먼 중국 본토에 있었던 이민족의 국가로 보일 수 있겠지만, 삼국이 중국 본토에 있었다면, 당나라는 그 중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나라이지 않을까 하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고구려 유민으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 중국의 산둥반도 일대 15개 주를 다스린 기록이 있는 이정기(李正己, 732년 ~ 781)는 고구려 출신의 장군이며, 사후 제나라의 시조로 추존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이며, 732년 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문제는 위 이정기의 성씨입니다. 위 이정기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 성씨인 이씨와 같은 성을 쓰고 있습니다. 당태종의 성씨는 이씨 중에서도 농서이씨라고 하는데, 현재 중국의 농서 지역은 아래 지역입니다.


농서.png 

 농서당.JPG 위 지도의 링샤 후이족 자치구와 린샤 후이족 자치구 사이에 위치한 B인수산에 있는 농서당 대루문


여기서 농서 이씨가 과연 어느 나라 성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 되는데 이를 단순히 한()족이라고 규정한다면당나라는 한족이 세운 나라가 되고 맙니다그러나 중국 본토에는 워낙 여러 민족들이 같이 섞여 살고 또 왕족끼리의 혼인관계로 여러 나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다 보니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은 듯합니다.


농서 이씨(隴西 李氏)의 역사를 살펴보면,  농서 이씨 당나라 왕족과 이태백의 본관이라고 하는데 농서 이씨는 4세기 유목 민족과 통혼하여, 북족적(北族的) 요소를 계승하였다고 합니다. 위 지도에서 명백히 드러나지만 농서 이씨는 정통 한족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고조 이연(李淵)의 가문은 선비족 북주(北周)의 우문씨(宇文氏), ()나라의 양씨(楊氏)와 인척 관계로, 수나라 말기 권력의 핵심부에 있다가 당나라를 건국하였다고 하는데, 농서 이씨의 발원지가 후이족 자치구에 인접하고 있다는 부분은 매우 의미 심장해보입니다. 소리나는 음으로만 따져 본다면 후이족이나 양자강 이남의 부이족이나 별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당나라 이후 농서 이씨는 매우 번성을 하게 되는데, 물론 당나라 시기에도 황제는 당연히 자신의 자손들을 각 국의 왕과 제후로 임명하였던 시기입니다. 위 고구려 인물 이정기가 여진인 이지란처럼 이성계의 신임을 듬뿍 얻어 성씨를 하사받은 것처럼,  당태종의 신임을 듬뿍 얻어 이씨 성을 하사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이정기는 원래 당태종 이세민과 같은 농서 이씨를 쓰는 당나라 왕족이었을까요?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서는 황해도 황주목, 서흥도호부의 별호가 농서(隴西)라고 정확히 못박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농서 즉 서흥도호부는 원래 고구려의 땅으로 오곡군(우차탄홀이라고도 함)이었는데, 신라에서 오관군(五關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동주(洞州)로 고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려 성종 을미년에 방어사를 두었으며 현종 때에는 방어사를 폐하고 평주 임내에 붙였다고 하며 고려 원종 때에는 태실을 봉안하고 서흥현으로 승격하여 영(令)을 두었으며 조선 태종 15년에 지군사로 승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 세종실록 기록을 참고한다면, 농서 땅은 한 떄 고구려 땅이었다가 후일 신라 땅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고구려 땅이었던 농서 지역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라에 편입이 되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서 당나라는 그 이름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당 연합군이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관계는 차치하고,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기 전인 640여년경의 백제 무왕시절당나라와 백제와의 관계 역시 의문이 듭니다.

 

삼국사기뿐 아니라 중국의 역사서인 신당서에는 641 3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라고 하였다. 사신이 당나라에 들어가 소복을 입고 표를 받들어 임금의 외신(外臣)인 부여장(夫餘璋)이 죽었다(君外臣扶餘璋卒).’라고 하자 (帝/ 당나라 황제)가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라고 되어있다는 것이죠.  일국의 제왕이 다른 나라의 임금이 죽었을 때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였다는 예는 <구당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서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부여족인 백제의 왕가와 후이족인 당나라의 왕가가 혈연관계였는지 아니면 외척관계였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위 기록 상 등장하는 외신(外臣)이란 말을 통해 당나라와 백제가 최소한 외척관계에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삼국의 역사 무대를 한반도가 아닌 중국 본토로 이전해가게 될 경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 역사와 관련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 내용과 분량이 너무 방대하여, 이 부분에 대해서는 향후, 더 시간을 두고 관련 내용들을 차근차근히 검토해봐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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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가 수집한 농서 이씨와 관련된 한가지 의미심장한 자료가 있어 올려드립니다.


아래 사진은 중국 사오관시 남웅주기항의 사진인데요, 남웅주기항은 중국의  170여개 성씨의 종사가 모셔져 있는 곳으로 유명하죠. 그런데 이 남웅주기항의 170여개 종사 중에서 단연 이씨 종사가 가장 중심에 있고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고 웅장해보입니다.


<사오관시 남웅주기항 항공 사진>

남웅주기항.PNG   남웅주기항 사오관.png




  <남웅주기항 이씨 대종사 msn010.gif https://ssl.panoramio.com/photo/91227419 >  



남웅주기항 이씨대종사.PNG


이래는 이씨대종사 다음으로 화려한 오씨대종사 msn010.gif https://ssl.panoramio.com/photo/89936764    이씨대종사에 있는 황제 상징 문양인 용 기둥이 여기에도 세워져 있습니다. 규모는 이씨대종사만큼 크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이씨대종사에 이어 두번째로 규모가 큰 종사같아 보입니다. 

오씨.JPG


아래는 등씨기념관입니다. msn010.gif https://ssl.panoramio.com/photo/89952707  등소평 가문의 성씨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우측은 채씨 대종사 msn010.gif https://ssl.panoramio.com/photo/105423763 


등씨 채씨.png


재미로 퍼왔습니다.^^  노씨 종사 msn010.gif https://ssl.panoramio.com/photo/105423783   문씨 종사 msn010.gifhttps://ssl.panoramio.com/photo/89936520 입니다. 그리고 그 옆은 왕씨 종사 msn010.gif https://ssl.panoramio.com/photo/89936516입니다. 고려 왕씨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노씨.png

아래는 기타 종사들  msn010.gif https://ssl.panoramio.com/photo/89936424


   기타.png

남웅주기항의 종사에는 총 170개의 성씨가 있는데, 중국 성씨 뿐 아니라 한국의 성씨같아 보이는 성씨들도 꽤 되어 보입니다. 참고로 제 성은 정(丁)씨인데, 원래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정씨 성은 안보이네요.ㅠㅜ 

 

세계일보에 실린 정(丁)씨 성에 대한 설명입니다. 어째 세계일보는 남의 성을 저렇게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지.... 저보다 더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세계일보 2013.03.05) msn010.gif http://www.segye.com/newsView/20130305003975 msn010.gif

저의 성은 압해정씨에 영성(영광)정씨입니다. 조선 초 최초의 한글로 된 가사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이 바로 저의 직계 조상이라고 합니다. 정극인의 상춘곡은 현재 전해지는 조선시대 한글 가사 중 시기적으로 조선 초 용비어천가 다음 순으로 전해지는 한글 가사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채수의 "설공찬이"보다 더 앞서 적혀진 한글 문학 작품이죠.  상춘곡을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산림에 은거하며 지내던 은일거사였던 정극인은 이미 신선의 경지에서 구름 속에 앉아 세상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그의 신선을 노래하는 경지는 김시습도 울고 갈 지경입니다.^^. 

   <상춘곡 일부>

   淸流를 굽어보니, 떠오나桃花(도화)로다   武陵(무릉)이 갓갑도다. 져 모이 긘 거인고

   松間 細路杜鵑花(두견화)를 부치 들고,  峰頭(봉두)에 급피 올나 구름 소긔 안자 보니,   

   千村萬落(천촌 만락)이 곳곳이 버려 잇네 煙霞日輝(연하 일휘)는 錦繡(금수)를 재폇는 듯




아래 이씨대종사 좌측 사진의 노란 원 안에는 개조(開祖)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나라를 연 조상이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기둥에 있는 용 문양은 황제의 상징이죠. 또 우측 사진은 이씨대종사의 내부 모습인데, 가운에 원 안에 농서(隴西)당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아래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농서당이란 농서 이씨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측 사진의 좌측 기둥에는 계동이굴주진원농수종지라고 적혀있고, 우측 기둥에는 보요순창도학흥대당조억만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동이족을 계도하고 주나라 진나라의 한족을 그 근원이 되는 농수(농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의 종지에 무릎 끓리며... 요순을 보필하고 도학을 융성히하여 대당조를 억만년 흥하게 한다... 는 의미의 글이 적혀 있습니다. 

                                                                                                       

                                                                                                         msn010.gif  https://ssl.panoramio.com/photo/91227590

개조 이씨 종사.PNG  군현청에 새겨진 글.PNG


남웅주기항에 기록되어 있는 농서 이씨 


롱서당.PNG



위 역사적 유물에 나타난 바로는... (이씨대종사에서는 중국 땅에 살면서 어떻게 자손들에게 내놓고 저와 같이 지독한 인종차별적 글을 남겨서 전하고 있는지는 도저히 저로서는 상상히 가지 않는 일이지만),  당나라 성을 쓰는 농서 이씨는 동이족과 한족을 계도의 대상이자 무릎을 끓려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 남웅주기항의 유적의 내용, 그리고 위 남웅주기항에 이씨 대종사가 세워진 시점,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등을 참고한다면, 위 이씨대종사는 조선 왕조의 이씨였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데, 그렇다면 조선을 건국한 전주 이씨 이성계의 조상이 원래는 당나라 왕족인 이세민의 후예인 농서 이씨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도 듭니다. 그런데, 또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조 연산군 때의 기록에 역시 농서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당시 유자광이 성리학자였던 남효온이 지은 시 "안생이 죽으니 지음이 없어지고, 홍자가 시골에서 부역을 하니 우리 도가 궁하도다. 대유는 있지만 추향이 고달프니 이 심회를 농서공(隴西公)에게나 이야기하리"라는 시를 언급하자 연산군이  농서공(隴西公)이란 것이 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습니다.  이때 유자광이 "농서공이란 옛날에 이릉(李陵)과 이백(李白)이 농서에 살았기 떄문에 후세 사람이 이씨를 통칭해서 농서라 이릅니다." 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이씨 조선의 이성계가 꼭 농서 이씨였다고 단정짓기도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또 아래는 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정조 14321일, 1790년 


  " 개국 공신(開國功臣) 상산군(商山君이민도(李敏道) 농서(隴西사람이다. 개국 초에 우리 나라를 도와서 이름이 원훈(元勳)에 올라 있는데 그의 묘지(墓地)를 요즘에야 비로소 찾아내게 되었다. 내가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주게 하고 이어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묘비문을 짓게 하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작년에 연경(燕京)의 책방에서 농서보(隴西譜)라는 책을 얻어냈고 지금은 또 상산군의 묘비문을 짓게 되었다.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선계(先系) 농서에서 나왔다고 하니, 희귀한 일이다. 판부사 이복원(李福源)이 찬진(撰進)하고 검교 직각(檢校直閣이만수(李晩秀)가 서진(書進)토록 하라."


정조가 연경의 책방에서 구한 농서족보를 보고 "연안 이씨의 조상이 농서에서 나왔다고 하니 희귀한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연안 이씨의 발원지인 연안은 위 지도 상의 C 연안시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래는 위키백과에 올라와 있는 연안 이씨에 대한 설명입니다. 연안 이씨는 현재 한국 사람의 성씨라고 합니다. 

 < 위키백과 >

연안이씨(延安李氏) :  시조 이무(李茂)는 본래 당(唐)나라 출신으로, 고종(高宗)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 나당(羅唐) 연합군 대총관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將)이 되어 신라에 들어와 백제를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워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그 후 신라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후손들이 시조가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연안(延安) 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고 문헌이 없어 선계를 고증할 수 없다. 계보는 실전되어 정확한 계대(繼代)를 알지 못하여 후손들은 고려시대를 기점으로 10개파로 나뉘었다. 소부감판사공파(小府監判事公派) 이현려(李賢呂),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이습홍(李襲洪),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이송(李松),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이지(李漬),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이해(李核), 이부시랑공파(吏府侍郞公派) 이분양(李汾陽),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이방(李昉),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이득량(李得良),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이백연(李伯衍),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 이계연(李季衍)을 중시조로 하여 각각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문헌이 전해지지 않아 이들 계파는 시조와의 세계는 물론 각 파조들 간의 세대관계도 모른다.



이씨 성을 가진 정조(북조선 / 영조와 정조는 청나라가 강성했던 시기의 왕으로 막강한 청나라의 힘을 등에 업고 북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쥐게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조차도 당나라 농서 이씨가 조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부분에 대한 의혹의 해소는 세조 반정 세력과 남조선 이씨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듯한데, 여하튼 이 부분은 이씨 당사자가 해명을 하지 않는 한, 나머지 성씨들에게는 두고 두고 풀어야 할 장기 미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찌되었든 근세의 중국 남조선 땅에 남아있던 당나라 이세민의 후손들은 당나라 이씨 종족을 특칭하여 한족이나 동이족과는구별되는 특출난 종족으로 스스로를 규정짓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농서 이씨들이 동이족을 가르치고 한족을 자신의 발아래 무릎 끓려야 할 상대로 생각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통해 보면 당나라 태조 이세민은 한(漢)족이 아니었다는 것 하나는 명백한 듯합니다.  


또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한다면서 2천~3천만명의 자국민을 학살하고 온갖 문화 유적을 부수고 불태우는 과정에서 2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 심한 문화유적  파괴가 있었다는데, 특이하게도 남웅주기항의 이씨 대종사는 여전히 그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둥에 새겨진 피냄새 자욱한 말들은 또 어떻구요~ 그런데 위 남웅주기항에 있는 성씨 중에 농서 이씨 바로 밑에 서하당 모씨가 보이는데, 이는 모택동의 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1990년 중국 인민대학 도서고적연구소의 관원 송평생 등은 <중국 인민대학도서관장가보목록>을 편찬하다가 하나의 진귀한 족보자료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모택동의 성씨인 《소산모씨족보(韶山毛氏族谱)》가 1941년의 모씨서하당(毛氏西河堂)의 활자인본(活字印本)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중국 기록을 보면 모택동의 성씨는 서하군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서하모씨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다만, 이씨 옆에 있는 전씨 성이 전두환의 선조가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ㅠㅠ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위 삼국대전이 일어났던 황산벌이 위치한 황산은 한반도의 논산 황산벌 지형과는 좀 다른, 큰 강에 바로 인접해 있는 지역이었던 듯합니다.

 

가령,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연산현(황산군)에 대해 호수가 378호요, 인구가 1487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9명이요, 진군(鎭軍)2명이요, 선군(船軍)162명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거의 가구의 반이 수군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황산군의 속현이었다는 진잠현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실록 기록에 의하면 호수가 153호요, 인구가 583명인데 수성군(守城軍)2, 선군(船軍)92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체 가구의 3분의 2 가량이 수군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실록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황산은 마치 큰 강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도시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매우 주목할 부분은, 이 황산군에 있다는 석성과 관련된 기록입니다.

 

세종실록 기록에 의하면 "황산군에 성황산 석성(城隍山石城이 있는데 둘레가 493보이며, 지세가 험하고, 안에 샘이 하나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군창(軍倉)이 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논산 계룡에서는 이와 같은 석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고려 태조 왕건이 황산벌에서 후백제를 평정한 후 큰 절을 황산(黃山) 골짜기에 세우고, 절 이름을 개태(開泰)라 하였다는 기록과 같이, 지금 이 인근에 개태사라는 아주 작은 절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매우 재미있는 것은 세종실록 기록에 의하면 충청도 예산에도 황산군에 있는 석성과 아주 똑같은 석성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석성의 이름은 무한산석성(無限山石城 / 무한산성無限山城 / 무한성(無限城 )인데 둘레가 428보이며, 지세가 험하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군창(軍倉)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의 둘레만 오십보 백보 차이일 뿐, 지세가 험하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는 것, 그 우물이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 또 안에 군창이 있다는 부분이 모두 일치합니다.

 

그런데, 더욱 더 재미있는 부분은 세종실록 기록에서는 예산에 있다고 기록된 무한산성(無限山城)이 조선 선조 때에는 경기도 안성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성의 이름은 무한(無限)이라는 한자까지 똑같습니다. .

 

 선조 28823일 1595년 


  "우리 나라의 산성 중에 안성(安城) 무한성(無限城) 같은 곳은 형세가 매우 웅장하여 참으로 이른바, 한 장정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의 군사도 뚫고 들어올 수 없다는 험고한 곳이라고 할 만하니 일찍이 서둘러 수축(修築)하여 관방(關防)의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

 

그리고 현재 한반도 경기도 안성시에서는  무한성이라는 석성이  안성에 있다면서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한산성.JPG




물론 위 경기도 안성의 무한성은, 선조실록의 "안성의 무한성이 형세가 매우 웅장하여. 만 명의 군사도 뚫고 들어올 수 없다는 험고한 곳"이라는 기록과 완전히 배치되는 설명입니다그런데, 또 충청도 예산에 있는 무한성은 아래 성종실록을 보면 천방(川防)에 의존하고 있는 성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천방이란 냇물, 강물과 닿아있는 기슭에 쌓은 둑이라는 의미입니다.   

 

성종 20315일,  1489년 


  " 경차관 이의가 충청도에서 돌아와 수적을 방비할 대책 등을 건의하다.  "천방(川防)의 이로움이 제언(堤堰)보다 중한데 천방은 회계(會計)에 기록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감사(監司)와 수령이 급하게 여기지 아니합니다예산(禮山) 무한성(無限城) 천방 청주(淸州) 작원(鵲院) 천방은 모두 폐기해 놓고 수축(修築)하지 아니하므로 백성들이 많이 한스러워합니다신이 도적을 잡을 계책을 널리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영광(靈光) 어을외도(於乙外島)·병풍도(屛風島)·증도(甑島)·모야도(毛也島)·고이도(古耳島) 등지는  하삼도(下三道)의 배가 모두 이 땅을 경유하기 때문에 수적이 많이 엿보고 있다가 틈을 타서 겁략(刼掠)합니다."


여기서 잠시 조선왕조실록의 지명을 대하실 때  염두에 두어야할 부분과 관련하여 말씀드려야 할 듯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지명을 한자와 이두식 표기를 동시에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의 지명들의 경우 이와 같은 경향이 훨씬 심합니다. 가령 한자로 된 비슷한 지명을 찾을 수 없을 경우 이두식 표기를 염두에 두고 소리나는 음을 따라 지명을 찾으면 뜻밖에 관련된 지명이 툭 튀어나옵니다. 


또 하나는 위 경우에 보이는 것처럼, 한자까지 같은 이름의 무한산성이 충청도 예산은 물론 경기도 안성에서도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은 혼란이 생기는 이유는, 실록 기록이 어느 왕의 시대를 기록한 것이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인데 가령 당대 왕이 어느 시기, 어느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왕이 거처하고 있는 서울이 달라지게 됩니다. 경기는 서울 인근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서울의 위치가 바뀌면 당연히 경기 지역의 위치도 같이 이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세종실록 지리지에 충청도에 무한산성이 있는 것을 보면, 세종이 왕으로 통치하던 영역은 무한성이 있는 곳보다 북쪽에 위치한 곳을 서울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충청도 무한성을 경기 지역으로 기록한 선조는 아마도 충청도 인근 지역을 서울로 삼고 통치하던 왕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황산군을 언급하다 갑자기 무한성을 언급하게 된 이유는 바로 황산군에 있는 성황산석성 때문입니다. 마치 성황당을 의미하는 듯한데, 지세가 험하고 안에 군창이 있다는 것을 보면, 이 산성은 무슨 종교적인 의미의 석성이 아니라 전쟁에 대비하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황산성은 성황당과 관련된 의미가 아니라 그 소리나는 음을 취한 표기 방식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해낼 수 있게 됩니다.

 

또 성황산의 뒷글자인 황산은 황산군의 지명을 딴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앞에 붙은 성자는 또 어디서 끌어다 갖다 붙인 말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해답은 역시 세종실록지리지에 있습니다. 세종실록 연산현 관련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太祖)가 황산벌 전투에서 후백제를 평정한 후 큰 절을 황산(黃山) 골짜기에 세우고, () 이름을 고쳐 천호(天護)라고 하였다고 합니다다시 말하면 고려 건국을 기점으로 황산이 천호산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아마도 성황산이란 말은 천호산이라는 이름과 황산이라는 지명이 혼돈을 겪으면서 생겨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충청도 연산면에 있다는 성황산성의 특징이 충청도 예산에 있다는 무산성의 특징과 일치히고 있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성황산성의 경우 마치 큰 강에 둘러싸인 섬처럼 거주민의 대부분이 수군입니다. 무한산성 역시 강에 인접해 둑(천방)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한산성과 성황산성의 차이라면 하나는 충청도 예산에 있고 하나는 충청도 황산에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한반도 지도 상으로 볼 때에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영역이기는 한데, 이를 중국 땅으로 옯겨놓고 보면 모든 의문이 순식간에 풀려버리게 됩니다.


       

       


             





황산1.png.jpg



위  원 안의 지도를 확대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황주.png

좀 복잡해보이지만, 요는 중국 후베이성의 무한시 인근의 황강시를 포함한 주변의 지명이 옛적에는 황산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죠.


일단, 위 지도상의 무한과 황강시 주변의 지명들이 모두 황(黃)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또 지도상에서 위 황강시의 옛 지명은 황주로 표기되고 있고, 그 곳에 아래와 같은 황주 고성이 남아 있습니다. 


<황강시 장강변의 황주 고성 msn010.gif https://plus.google.com/photos/photo/107050212964341591910/6426035604520549666 >

 

황주서성.JPG


보통 지명이 산(山)으로 끝나는 경우 지형적 특성을 나타내는 산(山)을 주(州)로 바꿔 부르는 일이 매우 많기 때문에 황주와 황산이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또 위 황강시의 '황'의 영어 발음이 중국어의 일반적인 황 (huang)의 발음과 달리 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촹" 발음으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중국어의 영어식 표기법이 제정되기 이전의 발음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고려에서 불렀다는 '천호'를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위 지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황강시에는, 무한산성이 있다는 충청도의 예천현과 발음이 비슷한 뤄텐현이 소재하고 있습니다. 무한산성의 "무한" 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 옆의 도시 이름 무한을 본따서 만들어진 이름 같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이 무한산성이 강에 인접해 있어 둑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고 거주민의 과반수가 수군으로 종사하고 있다고 하는데, 위 황주고성이 바로 장강 변에 임하고 있고,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성벽이 장강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또 황강시를 지나는 장강은 중국의 내륙으로 통하는 매우 중요한 수로 역할을 하고 있기 떄문에, 수군의 역할이 중요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아래는 무한시와 황강시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검색되고 있는 개태(開泰)입니다. 한국 논산에 있는 개태사의 개태와 한자까지 똑같습니다. 이 지역에서 개태라는 명칭이  많이 검색되는 것을 보면 과거에 개태사와 같은 유명한 절이 있어 그 이름이 주변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황강시의 개태시정공정건설공사>                                   <무한시의 개태>



개태1.JPG   개태2.JPG



아래는 황강시 북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황수판촌 사진입니다. 현재 한반도 논산의 계룡산 기슭의 황산벌이 산과 논, 밭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과 달리 주변이 완전히 허허 벌판입니다.


<황강시 황수판>


황수판촌.png


구글의 위 사진은 360도 뷰가 가능한 사진인데,  마치 전쟁 영화에서 한번은 본 듯한 그런 느낌이 드는 끝도 끝도 없는 벌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구글지도에서 황강시를 검색하시면, 위의 사진을 찾으실 수 있는데, 360도 뷰가 가능합니다. 궁금하신 분은 한번 들어가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msn010.gif  https://www.google.co.kr/maps/place/%EC%A4%91%EA%B5%AD+%ED%9B%84%EB%B2%A0%EC%9D%B4+%EC%84%B1+%ED%99%A9%EA%B0%95+%EC%8B%9C/@31.23841,115.06276,3a,75y,162h,90t/data=!3m8!1e1!3m6!1sAF1QipOWkMsxEPEXwHoa-lRv-WBcGu-Tq5dNj3VCcuk0!2e10!3e11!6shttps:%2F%2Flh5.googleusercontent.com%2Fp%2FAF1QipOWkMsxEPEXwHoa-lRv-WBcGu-Tq5dNj3VCcuk0%3Dw203-h100-k-no-pi-0-ya342.9177-ro0-fo100!7i6144!8i3072!4m13!1m7!3m6!1s0x31508e64e5c642c1:0x951daa7c349f366f!2z7KSR6rWt!3b1!8m2!3d35.86166!4d104.195397!3m4!1s0x342d050da2a63967:0xf3c9e0d1ade1b48e!8m2!3d30.4534091!4d114.8730469 ) 



한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황산군이라는 이름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모두 검색이 되는데, 그 위치를 보면, 황산군은 전라도 전주의 윗쪽, 경상도 삼가현의 서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황산군이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선 상에 있는 것이 맞는 듯한데, 또 성종실록에서 경차관 이의가 충청도 황산군의 수적을 막을 방도를 고민하면서 하는 말이 "하삼도를 지나는배가 모두 이땅을 통과한다."고 한 것과 같이 황산군을 끼고 도는 장강은 장강 상류와 하류 그리고 장강 이남의 충청도, 호남성, 경상도가  모두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중국에서 삼국대전 장이라는 이름으로 삼국지의 적벽대전 유적지로 소개되고 있는 센닝시에는 진짜 적벽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 적벽은 위 지도상의 황주 고성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죠.


<센닝시 삼국지 적벽대전 장의 적벽>msn010.gif

https://www.google.co.kr/maps/place/%EC%A4%91%EA%B5%AD+%ED%9B%84%EB%B2%A0%EC%9D%B4+%EC%84%B1+%EC%85%B4%EB%8B%9D+%EC%8B%9C/@29.874961,113.630871,3a,75y,111h,90t/data=!3m8!1e2!3m6!1sAF1QipNR8pvk2nfMwAlhxP5BZFjiRKn8QUmDfcTCAEgR!2e10!3e12!6shttps:%2F%2Flh5.googleusercontent.com%2Fp%2FAF1QipNR8pvk2nfMwAlhxP5BZFjiRKn8QUmDfcTCAEgR%3Dw203-h114-k-no!7i4128!8i2322!4m13!1m7!3m6!1s0x31508e64e5c642c1:0x951daa7c349f366f!2z7KSR6rWt!3b1!8m2!3d35.86166!4d104.195397!3m4!1s0x342f2e59643e64bd:0xa082e928044d822b!8m2!3d29.8418351!4d114.3223572

적벽.png


보시다시피 센닝시 삼국지 적벽대전 장이라는 곳에는 강변에 누군가가 벽에다 붉은 글씨로 적벽이라고 써 놓고 이를 적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황주 적벽 > msn010.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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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 적벽.JPG 


 황주 적벽 msn010.gif 

https://www.google.co.kr/maps/place/%EC%A4%91%EA%B5%AD+%ED%9B%84%EB%B2%A0%EC%9D%B4+%EC%84%B1+%ED%99%A9%EA%B0%95+%EC%8B%9C+%ED%99%A9%EC%A0%80%EC%9A%B0+%EA%B5%AC/@30.4551,114.861644,3a,112.8y,50h,90t/data=!3m8!1e2!3m6!1s115945670!2e1!3e10!6s%2F%2Flh4.googleusercontent.com%2Fproxy%2F3jljCX2OxKtWgoThCPj2CJNZVI9aVSmxg-Q965p_JqZFraF2JLb5iHhklwLP278gpgfQe_gbdI2OAp4OV6TF2dmyax3E1co%3Dw203-h135-k-no!7i1000!8i667!4m13!1m7!3m6!1s0x31508e64e5c642c1:0x951daa7c349f366f!2z7KSR6rWt!3b1!8m2!3d35.86166!4d104.195397!3m4!1s0x342e7f001508a041:0x4abe6bf8a39e6854!8m2!3d30.4340589!4d114.8793983 


황주 적벽2.JPG




황주의 적벽은 보시다시피 벽이 붉어서 적벽이 된 것입니다. 이 적벽은 황강시에서 매우 유명한 곳인데, 엉뚱하게도 지금 중국에서는 무한시 아래 센닝시에 있는 옛 유적지가 삼국지의 적벽대전이 일어났던 곳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센닝시에 소재하고 있는 군사 진지는 임진왜란 당시의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위 적벽 고성과 센닝시에 세워진 군사 진지들을 한번 비교해보면 시기적으로도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센닝시 삼국지 적벽대전 장 전체 모습>


센닝시.JPG 


  msn010.gif  https://plus.google.com/photos/photo/113858871296877222790/6457697298142934722


적벽2.JPG



제 생각에는 위 세트 장은 아마도 임진왜란 때의 왜적의 진지를 복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센닝시에 위치한 아래 비문은 중화민국 28년(1939년)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왜구가 침범해왔을 때 항일 전쟁을 했던 한 무명의 영웅을 기리는 비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비문을 자세히 보면, 지금의 글자들은 예전에 비석 전체를 한 가득 메웠던 원래의 비문를 지워내고 그 위에 덧칠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 내용의 핵심부분도 근대에 씌워진 것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잘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  누구인가 예사롭지 않은 영웅이었기에, 비석을 파괴하지 않고 이름을 "무명의 영웅"으로 바꾸고 영웅이 활약했던 시기는 배제하는 식으로 비문을 다시 쓰는 차원에서 손을 본 듯합니다. 


msn010.gif  https://www.google.co.kr/maps/place/%EC%A4%91%EA%B5%AD+%ED%9B%84%EB%B2%A0%EC%9D%B4+%EC%84%B1+%EC%85%B4%EB%8B%9D+%EC%8B%9C/@29.035308,113.884505,-4a,48.2y,27h/data=!3m8!1e2!3m6!1s88459068!2e1!3e10!6s%2F%2Flh4.googleusercontent.com%2Fproxy%2Fe-jHFTR2vygmb6yq2zm9El694A8WeO4Q8Qg4plsFxspz88Lw2Wb40eUi3d43CJpKCoYyfu7yeEDts1Bz8evgtdNgjKgHpw%3Dw203-h135-k-no!7i2400!8i1600!4m13!1m7!3m6!1s0x31508e64e5c642c1:0x951daa7c349f366f!2z7KSR6rWt!3b1!8m2!3d35.86166!4d104.195397!3m4!1s0x342f2e59643e64bd:0xa082e928044d822b!8m2!3d29.8418351!4d114.3223572

비문.png


센닝시와 무한시 인근의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장강이 두갈래로 나뉘는데 아래 쪽으로는 웨양현(이곳은 현재 중국의 호남성에 속하는 영역으로 군산이라는 지명이 있음.)과 동정호(한국 고전 소설의 주무대임 / 조선 초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한국의 대부분의 고전 소설들의 배경이 주로 동정호 인근에 머무르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일 여유가 되면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가 있고, 또 윗쪽으로는 형주시가 나옵니다. 중국에서 유난히도 항일 의사를 기리는 기념 유적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역들 입니다. 


그렇다면, 센닝시가 아닌 황주에 있는 적벽이 진짜 삼국지의 적벽대전이 일어났던 곳이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진짜 적벽이 있는 황주의 황산벌에서 치열한 대전을 벌였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삼국지의 삼국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삼국지의 적벽대전이 일어났던 시기와 역사적으로 유명한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던 시기가 수백년의 차이가 있다는 점만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2017.10.06


정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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