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5
정윤경
조회 수 : 182
2017.08.22 (23:28:37)





                     

                     




                    



 

  <문서에 관한 죄>


공문서위조변조죄 (형법 255): 행사할 목적으로 공무소(公務所또는 공무원의 명의로 직무상 작성하는 문서 또는 도화(공문서)를 위조 또는 변조하는 자는 5년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이하 의 벌금에 처한다.

 

*사문서위조변조죄 (형법 231): 행사할 목적으로 권리·의무 또는 사실증명에 관한 타인의 문서 또는 도화를 위조 또는 변조하는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재물. 문서손괴죄 (형법 366타인의 재물 또는 문서를 손괴 또는 은닉 기타의 방법으로 그 효용(效用)을 해하는 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위조사문서등의 행사 (형법 234231조 내지 제233조의 죄에 의하여 만들어진 문서도화 또는 전자기록등 특수매체기록을 행사한 자는 그 각 죄에 정한 형에 처한다.① 위조변조 또는 자격을 모용하여 작성한 권리·의무 또는 사실증명에 관한 타인의 문서 또는 도화를 행사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 ② 위작 또는 변작한 권리·의무 또는 사실증명에 관한 타인의 특수매체기록을 행사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 ③ 허위로 작성된 진단서검안서 또는 생사에 관한 증명서를 행사한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7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허위공문서작성 죄 (형법 227공무원이 행사할 목적으로 그 직무에 관하여 문서 또는 도화를 허위로 작성하거나 변개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허위공문서 등 행사죄 (형법 229위조·변조·작성·변작 또는 부실기재한 공문서·공도화·공정증서원본·면허장·감찰 또는 여권을 행사하는 죄위조·변조·작성·변작 또는 부실기재의 각죄에 정한 형에 처한다주체는 공무원이든 아니든 불문한다. '행사'는 위조·변조 등의 문서를 그 용법을 따라 진정·진실한 것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하며 그 정을 알고서 행사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한 위조문서 그 자체를 행사하여야 한다행사는 제시(提示교부(交付비치(備置등 어떤 방법에 의하여서도 상대방이 이것을 열독(閱讀)할 수 있는 상태에 두기만 하면 된다.

 

*공전자기록위작·변작 (형법 227조의2) 사무처리를 그르치게 할 목적으로 공무원 또는 공무소의 전자기록등 특수매체기록을 위작 또는 변작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사전자기록위작·변작 (형법 232조의2) 사무처리를 그르치게 할 목적으로 권리·의무 또는 사실증명에 관한 타인의 전자기록등 특수매체기록을 위작 또는 변작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공문서등의 부정행사 (형법 230공무원 또는 공무소의 문서 또는 도화를 부정행사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사문서의 부정행사 (형법 236권리·의무 또는 사실증명에 관한 타인의 문서 또는 도화를 부정행사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무고죄(誣告罪)는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수사기관이나 공무소 또는 공무원에 대하여 허위의 사실을 신고함으로써 성립되는 대한민국의 범죄를 말한다.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자격모용에 의한 사문서의 작성 (형법 232행사할 목적으로 타인의 자격을 모용하여 권리·의무 또는 사실증명에 관한 문서 또는 도화를 작성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기타 등등 





   고죄(誣告罪)는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수사기관이나 공무소 또는 공무원에 대하여 허위의 사실을 신고함으로써 성립되는 대한민국의 범죄를 말한다.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형법 제 156조) 


 

개인적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형법에 문서에 관한 죄명들은 엄청 종류가 많은데,  굳이 법 전공하실 거 아니라면 그 내용 다 아실 필요도 없습니다. 걍 무고죄 하나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이 많은 죄명들 무고죄 하나로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초련



                   



1. 정윤경 날인 및 서명과, 포스코 건설이 법원에 제출한 정윤경 날인과 서명, 그리고 문서의 활자체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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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

    서 위조 고소 건으로, 형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저는 줄곧 증인으로 재판에 참석하였습니다. 재판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고, 그 과정에서 제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법원은 검찰의 주장, 피고소인의 주장은 다 받아들이면서, 막상 피해자에게는 당연히 주어졌어야 할 법정 변론의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구형을 선고해버렸습니다. 변론을 하는 날인 줄 알고 재판에 출석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구형선고를 당한 마지막 날, 검찰 공무원이 증인석에 나와 증언이랍시고 하는 주장을 듣던 날, 저는 설마설마 하던 의혹,  이곳이 혹시 지옥이 아닌가? 내가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어 어쩌다 악마들하고 같은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확신으로 굳혀지던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심한 구토 증세와 함께 좋아하지도 않는 놀이기구에 갇혀버린 느낌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법정 밖으로 튀어나왔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땅에 박고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이후 대법원, 헌법재판소에 수도 없이 위헌재판과 관련한 각종 청구를 하였지만, 끝내 묵살되었습니다. "너가 어떤 재판을 받건 그건 법정에서 다툴 일."이지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제와서 무슨 문건의 위조 사실을 입증하고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만,  제가 그 당시 느꼈던 기분을 이 자리를 빌어 노래로나마 표현을 하면, 지금도 순간 순간 저를 옭아매는 심각한 우울증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은 분들과 함께 듣고 싶습니다.


             바람의 빛깔

    

             






     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2.JPG




      

                            랑           


             


2. 조

  선왕조실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래 6번에서 인용한 태종 신도비문의 탁본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종 신도비문을 보면  중간 중간 중요한 단어들이 지워져 있습니다. 이 신도비문의 기록은 왕조실록에 그대로 옮겨져 기록되고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신도비문의 지워진 글자 자리를 특정한 인물, 특정한 지역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전체 글의 약 5% 정도가 지워져 있는 것을 보면, 실록 기록의 5% 정도가 조작되었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문제는 그 5%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핵심 키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참으로 다행인 것은, 지워진 5%를 제외한 나머지 95%의 내용은 실제 기록의 있는 그대로를 인용하고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워낙 방대한 분량의 기록이고 또 내용의 질을 보더라도  수천권의 역사 서적과 수천편의 역사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가 될 만한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와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작업은 결코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 의도적으로 조작을 가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몇가지 사항에 대해서만 유의를 하신다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매우 유용한 문화적 자산으로 활용하실 수 있을 듯합니다.   몇가지 유의 사항에 대해서는 글을 써나가는 중에 틈틈이 언급을 해드리려고 합니다.  


 




     3. 여유당전서


          여유당전서.JPG 


 3. 1925년

      (을축년)8월 서울에 사상 유례가 없는 대홍수가 일어나게 됩니다. 동년 88일자 신문에 의하면당시 수해로 각종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 가운데, 양주 한강변의 정약용 생가가 물에 잠겨 여유당전서 일부가 유실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이가 그 다음 해(1926)에 여유당전서 간행을 위해 필사적으로 여유당전서를 필사한 필사본을 만들었는데, 이 필사본을 토대로 신조선사를 지은 권태휘란 사람이 계획하고 가닥을 잡아 재편찬된 책이 현재의 여유당전서라고 합니다. 솔직히 저는 신조선사나 권태휘란 인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지만, 당시는 일제가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또 이미 유실된 책을 무엇에 근거해 이를 필사하고 편찬했는지에 대해서도 미궁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유당전서 중 특히 아방강역고 부분의 경우, 의도적으로 조선을 한반도 내로 그 지리적 영역을 국한시키려고 한 흔적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1934년 여유당전서가 출간되면서, 동아일보에서는 다산의 여유당전서와 관련된 내용으로 지면을 도배하는데, 이때 다산 정약용에 대한 띄우기 작업도 같이 진행됩니다. 정약용의 절대적인 명성을 빌어 한반도 내로 국한 된 조선 지리에 나름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반도 내로 많은 문화 유적과 대학, 공공기관들이 이전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개의 람 어

               

                


 

 오늘 자 기사에 거론된 다산의 천주교 신자 논쟁과 관련하여서입니다.

 (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70828_0000079376&cID=10701&pID=10700 )

 

다산은 누가 뭐라해도 조선의 도학자이고 성리학자였습니다. 다산 정약용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먼저 조선의 성리학을 조선의 신학으로, 유럽의 천주학을 서양의 신학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 도교 이야기>의 정약용 관련 내용을 참고하시면 될 듯합니다 .

 

조선시대 천주교 전파는 16세기 로마 카톨릭 예수회의 마테오리치 신부를 통해서였습니다. 정약용은 예수회의 마테오리치 신부가 중국에 선교를 할 당시보다 200년이나 늦게 태어났으므로 당연히 그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테오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를 읽고 서양의 인격적인 하느님과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상제, 천(하늘)이 모두 같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같은 인식을 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도학자들이나 실학자들 역시 이론은 있었지만 대체로 이애 대해 크게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카톨릭 교회에 있었습니다. 마테오리치가 소속된 예수회의 뒤를 이어 등장한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는 전례 문제로 17세기 초반부터 예수회와 대립하기 시작하는데, 예수회와는 달리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각종 민간신앙과 섞인 유교식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해석하여 배척하였고 또한 자신들의 하느님은 천주(天主)로만 해석이 가능하지 중국의 상제”, “으로의 번역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회 식의 선교가 중단된 시점은 교황 클레멘스 14세 때인 1773년이었습니다. 같은 해 69일 클레멘스 교황이 서명한 칙서에 의해 예수회 소유의 학원 266, 신학교 103, 거주지 88개를 포함한 11천 명의 회원들이 강제로 추방당하고 그 해 923일 예수회원들은 모조리 산탄젤로 성에 끌려가 감금되게 됩니다. 예수회를 변호하는 어떤 변론이나 반대도 금지되게 됩니다. (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_%ED%81%B4%EB%A0%88%EB%A9%98%EC%8A%A4_14%EC%84%B8 )

 

클레멘스 교황의 예수회 해산은 조선의 천주 신학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데, 그 시점이 바로 다산 정약용 등 조선의 학자들이 천주교를 배교하게 된 시점과 거의 일치합니다. 그때까지 천주교를 인정하였던 정조 역시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지으며 사교(邪敎)는 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 즉 성리학의 진흥으로 사교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합니다. 그런 가운데 북경에 있던 카톨릭 주교의 "조상제사 금지" 명령이 내려지게 되는데 이에 천주교 신자 가운데 조상의 제사를 폐하고 그 신주를 불태워 버리고 장례 이후 위패도 만들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떄부터 조선의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후 로마 교황청의 조상 제사에 대힌 입장은 많이 완화되었다고 합니다.

 

또 1935년 교황 비오 11세는 공자 존경의식을 허용하였고,  1년 후인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참배(神社參拜)를 허용하였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 다산 정약용을 천주교 신자로 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향후 천주교가 어느 정도까지 조선의 인격적인 하느님인 상제 혹은 천(天)을 카톨릭의 천주 수준으로 인정해주는가 하는 문제에 달리지 않나 생각됩니다.


  

             너라서                      너라서                                 너라서         

                          너라서                                                너라서           

            

             


 

 





4. 한성순보(1)


동서반구.jpg





 

    지도 그림은 한성순보 1883년 10월 1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우측은 지구의 동반구, 좌측은 지구의 서반구를 그린 것인데, 우측 동반구의 좌측 윗부분을 보면 동반구와 서반구의 경계선이, 지금의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가 아니라 그보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아이슬란드를 통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슬란드에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이 나뉘는 경계지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현재 아이슬란드 서부에 있는 싱벨리르 국립공원에서 이 두 대륙의 경계선이 육안으로 확인이 된다고 합니다.


<아이슬란드 싱벨리르 공립공원>                                          < 싱벨리르에 있는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 사이에 걸친 다리> 

아이슬랜드.JPG 레이프다리.JPG


아이슬랜드.JPG 싱벨리르.JPG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점은 위 두 대륙의 경계선이 있는 아이슬란드는 바로 옆에 있는 섬인 그린란드와 매우 혼동을 주고 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얼음으로 뒤덮인 섬이라는 뜻이고 그린란드는 녹색의 섬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래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두 섬은 자신의 특징과는 정 반대의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린란드 아이슬란드.JPG


그린란드는 얼음으로 뒤덮여 있고, 아이슬란드는 녹색 초원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두 섬의 이름이 뒤바뀐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데, 이 두 섬의 지명과 관련하여 수많은 설이 난무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인 듯합니다. 


먼저, 얼음으로 뒤덮인 나라인 그린란드의 경우, 이 섬을 최초로 발견한 바이킹이  당시 약간의 초원이 있는 해안가를 먼저 발견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고, 새로 발견한 땅이 얼음나라라고 하면 아무도 이주하지 않을 듯하여 이주자를 모집하기 위해 뻥을 친 탓이라고도 합니다.  반면 아이슬란드의 경우 최초 이주자인 게르만족이 이 땅을 발견할 당시에는 빙하에 둘러싸인 얼음 덩어리 나라였기 때문에 아이슬란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반면 그린란드는 그 당시 녹지가 많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은 기후가 뒤바뀌어서 두 나라의 기후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는 설입니다. 또 하나의 설은 새로 발견한 섬이 온화하고 사람이 살기 좋은 지역이라는 걸 알면  사람들이 서로 살겠다고 모여들까봐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게 하려고 얼음투성이인 그린란드와 뒤바뀐 이름을 붙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름도 이름이지만 이 두섬의 역사를 보면 좀 의문이 듭니다.  그린란드는 덴마크어로는 그뢴란(Grønland), 그린란드어로는 칼라알릿 누나앗(Kalaallit Nunaat)이라고 하는데 전자는 녹색의 땅, 후자는 사람의 땅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린란드의 초기 이주시의 기록을 보면 아이슬란드에서 이주한 바이킹들이 여기서 양이랑 염소,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밀농사도 지었다고 합니다. 마치 그린란드의 역사 기록은 그린란드가 지금의 아이슬란드와 같은 조건의 나라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합니다.  반면 지금의 아이슬란드로 불리는 섬에 대한 역사 기록을 보면 19세기에 기후 조건이 계속 나빠져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자 아이슬란드인들이 캐나다로 대략 이민을 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캐나다 땅에 가까운 춥고 황량한 지금의 그린란드의 역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다보니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의 이름이 뒤바뀐 게 아니냐는 의문이 여기저기서 나올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아래 5. 한성순보의 기사에서는 본초 자오선이 녹림(綠林)지방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녹림 지방의  현대 번역어는 그리니치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녹림지방이라는 말은 '녹색의 땅'이란 의미로 그린란드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 지구 그림에 의한다면 본초 자오선의 기준이 되고 있는 녹림지방은 아이슬란드 땅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아이슬란드라는 지명과 그린란드라는 지명이 혼동을 주고 있습니다.  또 지금의 본초 자오선의 기준이 되고 있는 영국의 그리니치 지역은 그린란드의 이름이 매우 비슷할 뿐 아니라, 위 지도 그림이 그려진 동반구 서반구의 경계선상에 있던 아이슬란드의 경우, 서쪽 끝 부분에 가까운 수도 레이캬비크 기준으로 UTC -1.5시간을 사용해야 하는데, 본초 자오선이 있는 영국과 똑같이 UTC+0 시간대를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때 본조 자오선이 지금의 아이슬란드의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을 갈리는 지점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아이슬란드는 당시만 해도 그린란드라는 이름으로 불려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BLUE


      지구.JPG



근대사를 훒어보다 동양 지역의 지명들이 지금과 다르게 매우 혼란스럽게 뒤섞인 모습을 본 탓인지, 그리니치와 아이슬란드의 이름이 뒤바뀐 시점이 과거 870년 처음 이 섬을 발견하였을 당시가 아니라 근대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본초 자오선이 확정될 때 즈음하여 이름이 뒤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5.   한성순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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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개의 작은 별(독일 원곡)                                         두개의 작은 별

             


  국의 그리니치 천문대가 세계 공식 본초 자오선으로 채택된 시기는 1884년 10월의 일입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의 제창으로 25개국 41대표가 워싱턴 D.C. 에 모여 국제 자오선 회의를 열었고 이 회의에서 그리니치 자오선이 세계 공식 본토 자오선으로 채택이 된 것이죠. 단 프랑스의 경우 평결을 기권하였고 이후에도 1911년까지 파리 자오선을 계속 사용했다고 합니다. 물론 1884년 10월 이전까지만 해도 각국은 자신의 수도를 본초선으로 삼고 있어 매우 혼란스러웠다고 하는데, 1883년까지만 해도 조선의 경우 북경을 본초선으로 삼고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아래 지도는 북경이 경선의 초도가 되고 있는 1734년의 d,anville 출판지도라고 합니다.(출처 : 위키백과 喀爾喀몽고


 북경 본초.JPG  (근대 지도 중에는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다양한 지도들이 인터넷에 엄청 많이 올라와 있는데, 위 지도의 경우 당시 대만 지역(함흥부)과 조선(용흥성, 길림성)의 경계를 대충 짐작하게 해줄 수 있는 듯하여 특별히 골라본 것입니다.)


위 한성순보 기사에서는 녹림선(綠林線) 즉 영국의 그리니치 자오선을 기준으로 지구의 경선과 위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조선의 경계와 서울의 경위선을 설명하면서 녹림선을 본초 자오선으로 하여 현재 한반도 서울의 동경선 127도를 정확히 뽑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는 그 위의 지도에서 아이슬란드를 본초 자오선으로 할 경우 산출되는 한반도 서울의 표준시하고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위 한성순보가 발간된 시기는 1883년 10월이고, 영국 그리니치 자오선이 세계 공식 본초 자오선으로 채택된 시기(1884년 10월)보다 1년 전의 일입니다. 어떻게 1년 후에나 가능한 표준시와 동경선이 그보다 1년 전의 신문 기사에 등장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은 위 한성순보 기사의 진위와 작성 시점을 의심케 합니다.  



또 위 기사에 등장하는 한반도 서울의 동경선 127도와는 달리 현재 우리나라는 표준시를 일본의 표준시인 동경 135도 선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표준시가 일본의 표준시인 동경 135도로 바뀌게 된 이유는 아마도 이왕가가 동경에 거주할 궁궐을 짓고 어전을 만든 시점 이후부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애인있어요"편에서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만, 이왕가는 일왕가와 합병을 하고나서 일본 동경에 어전을 짓고 왕가 규범을 만들어 공포하였으며 그곳에서  왕정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한반도를 황국의 식민지로 보고 있던 이왕가는 한반도의 표준시를 황국의 수도인 일본 동경을 기준으로 삼아 동경 135도로 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한반도의 표준시는 일본 동경의 표준시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대는 어디에  


                       

                          

                                                                                                      물고기자리


                                                                                                            


                                                 

  





 6. 태종 신도비문 


 

             태종대왕 신도비.PNG



6. 헌

  릉 비음기에는 1424년, 세종 6년 5월 12일 위 신도비문이 세워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능이 바로 태종의 능인 헌릉이라고 합니다.  위 신도비문 기록을 보더라도 1424년이 맞는 듯한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418년 11월 8일 태종의 승하를 슬퍼하여 그 아들인 세종이 변계량에게 명하여 헌릉 신도비문을 지어 바친 것으로 기록 ( 조선왕조실록 태종 18년 11월 8일)되어 있습니다. 


위 신도비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능의 이름 앞 부분이 이빨 빠진 것처럼 지워져 있습니다. 신도비문 전체를 보더라도 중간 중간에 빈 자리들이 많이 있는데, 그 빈자리들은 띄어쓰기한 자리가 아니고,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지워진 자리입니다가령 오른쪽에서 세번째 줄 중간에 전하(殿下)라고 적힌 부분 앞에 두 글자 자리가 비어있는데, 왕조실록에서는 보통 이런 경우를 한문으로 금상 전하, 한글 번역으로 우리 전하라고 표기하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능이 태종의 헌릉이라면 우리 전하는 이 신도비문을 세운 태종의 아들인 세종이라고 해석되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 비문을 보면 능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는 능의 이름도 지워져 있고 능의 비문을 세울 당시의 임금의 이름도 지워져 있어서 어떤 전하 때 누구의 신도비문을 세운 것인지 가늠하기가 힘들게 됩니다

 

일단 신도비문의 앞부분의 내용은 조선의 경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해주는 중요한 자료인 듯하여 번역하여 올립니다. 기존의 번역본에서는 능 주변을 빙 둘러싸 호위하고 있는 호안(護按)산을 빼먹고 번역을 해버려서 번역이 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위 신도비문에 뚜렷이 기재된 호안산을 주축으로 하여 제가 번역한 내용입니다

 

 능은 광주 서대모봉 아래 건해의 산,  곤좌손향(동남향)에 자리하게 하였으니 북쪽으로는 경성과의 거리가 30평리이다능을 호위하는 산(호안산) 장백산맥으로부터 내려왔는데남쪽으로 수천리를 뛰어넘어 상주 속리산에 이르고.  또 그 산줄기가 북서쪽으로 꺾여 수백리를 달려 과천 청계산에 이르고... 


비록 신도비문의 중요한 기재사항이 지워져 있기는 하지만, 위 기록은 실제 "장백산"의 산맥, 그리고 상주 속리산과 경성(한성)의 위치를 모두 추정할 수 있게 해줍니다.


          


          


상라오시.png


현재 우리나라 역사가들 사이에서 장백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많은 이론이 있는 듯합니다만 장백산이 백두산  북쪽 인근에 있는 산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크게 이론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설령 백두산을 중심으로 보더라도, 현 한반도상에서는 그로부터 뻗어내려온 산맥이 한반도 경기도 광주에 이른다는 설명이  전혀 들어맞지 않습니다. 또 광주에서부터 속리산까지의 거리가 수천리 된다는 신도비문의 기록과도 거리가 멉니다.


반면 위 가운데 노란 점은, 소위 한씨 조선설의 중심이 되고 있는 과거 한(韓)나라의 땅으로 (남)조선의 한성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위 지도로 보니 신기하게도 북방으로부터 길게 뻗어내려오는 긴 산맥이 노란 점에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란 점부근에서부터 남쪽의 상라오시까지의 거리가 가히 수천리라고 할 정도로 벌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위 노란 큰 원의 빨간 선 안에 있는 상라오시와 관련하여 설명을 잠시 드릴까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라 첨해왕 사벌국(沙伐國)을 취하여 주()를 만들었고,법흥왕(法興王) 상주(上州)로 고쳤다가  진흥왕이 주()를 폐하여 상락군(上洛郡)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상주였다, 다시 사벌주였다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는데, 위 신도비문에 기록된 공신의 이름 가운에 상락(上洛)부원군 김사위라는 호칭이 등장하는 것을 보니, 저 비문이 쓰여질 당시에는 상주를 상락으로 불렀던 듯합니다.(보통 군이나 부원군이라는 호칭 앞에 들어간 명사는 각 지방의 특정 지역을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왕이 신하에게 작위를 줄 때 땅덩어리도 같이 떼어서 주기 때문이죠.) 상락의 중국어 발음은 상루어.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참고하면 이 상루어는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중국의 동남쪽 지역과 신라와의 관계는 추후 조금 더 논의가 진행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지금 중국의 상라오시가 바로 상주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상라오에 있는 산을 상라오산, 발음을 빨리 하면 속리산과도 거의 발음이 같네요~


 




7. 려원홍 상해 국민회 대표 관련 기사 (1919년 7월 15일 신한민보 / 기사 제목 : 일본에 대하여 독립전쟁을 시작하리라 )


 여원홍 신한민보.JPG 하단 우측 려원홍 상해 국민회 대표 관련 부분 확대 ==>

여원홍 신만민보.JPG



  7. 

     일 국제연맹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으면 한국은 일본에 대하여 독립전쟁을 시작하리라. 

2천만 한국 민족이 일본의 무단 정치를 대항하기는 어려울 듯하나 그러나 (3.1운동을 한)한국인에게 17개월로 내지 30개월의 징역을 선고하였은즉슨, 일본의 노예 속박 밑에 사는 것보다 차라리 독립을 위하여 나중에 핏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혈전을 계속하는 것이 옳도다. 또한 한일 전쟁이 되면 일본에도 내란이 일어나 제국정부를 둘러엎고 공화국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

피살자 2만 수금자 1려대사는 또 이어 선언하되 거룩한 31일 이후에 일본 병정에게 잡혀 죽은 독립당원의 수효가 2만여명이오 감옥에 수금된 자가 1만명이며 지금 표면적으로 관찰하면 좀 조용한 듯하나 그 이면을 관찰하면 그 참혹한 현상을 다 말할 수 없도다무수한 동네들이 몰수되었고 그 집없이 사방에 유리구걸하는 인민이 수천명에 달하며. 일본 병정들은 한인을 산채로 불에 집어 넣어 화장하여 독립정신을 말살하려 하며, 일부로 불을 놓는 고로 무수한 생명이 화장되었으며... 

 

려대사는 찾아간 신문 탐보원에게 말하되 일본 병정들이 독립선언서를 분배하는 한국 여학생의 손목을 칼로 끊거나 혹은 뭇놈이 잡아 붙들어서 관절을 끊어버리는 혹독만행이 있었고 이 감옥 안에 수금된 여자에게 말 못할 짐승의 행위를 단행하므로 한인과 중국인의 일본물화배척은 날로 심하여 장차 전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관헌들은 한달전에 상해에서 프랑스(상해 프랑스 조계)관인을 속이고 전헌인, 윤은상 양씨를 강도범으로 잡아가던 간계와 같이 려 대사가 프랑스 조계에 가는 것을 잡고져 하여 려원홍을 강도라 하는 체포장을 가지고 려대사가 간 기선에 올라가 잡아가고저 하였으나 그 배는 프랑스제국 사람의 배라 그 함장이 허락지 않는 고로 일인들이 그 간계를 이루지 못하고 물러갔다.>

(참조려원홍 대표는 현금 프랑스 조계에 있는 미국인 00씨와 상의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찬조하려고 지난 111일에 미국에서 떠나 본국으로 들어갈 때에 국민회 중앙총회장과 대의장의 밀약으로 치송하였든 바 오늘 상해 프랑스 조계에 도달함은 국민회의 사명과 전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함이다. 장차 김규식 대사와 미국인 00씨와 동력하여 한국 독립문제를 국제 연맹회에 들여놓을 목적이더라 

 

...................................................................


참고로 동아일보 통신원을 지낸 여운형의 기록에 의하면, 여운형은 동아일보 통신원이 되기 전,  3.1운동을 주도한 신한청년단의 대표였으며 1919년 1월 (그의 출생년도는 1886년으로, 그의 나이 33세 때) 18일부터 프랑스에서 개최된 파리 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단의 한국 대표로 김규식(38세)을 파견하게 됩니다.


반면, 중국의 혁명가이자 정치인 려원홍(55세) 역시 같은 시기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 유럽으로 건너갔다는 기사가 매일신보의 '지나정세' 라는 제목하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 


여원홍 도구.JPG


                애인 있어요                                                                                               고해      


                                         


 이후 여원홍은 수시로 상해를 들락거리게 됩니다. 


아래는 여원홍으로 검색된 매일신보 기사 제목입니다. 여원홍이 상해에 수립하려고 하는 제 3의 정부는 연성정부(일종의 민족 자치 정부 / 현 중국의 '하나의 정부'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자치 정부를 꾸린 여러 성이 연맹하여 중국 정부를 이끌어가는 방식)였고 후에 그는 연성자치를 갈망하는 북방, 서남방 민족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게 됩니다.


연성정부.JPG 


여운형이 1918년 상해에서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1917년 7월에 발생한 장훈의 황실 복벽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한 후, 중국의 왕정이 막을 내렸음에도,  그 뒤를 이은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전제군주제로 회귀하자 여원홍을 비롯한 중국의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엄청난 저항 운동이 벌어지게 됩니다. 결국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사망하게 되는데, 이후 신해혁명의 영웅 여원홍이 중국 총통에 추대되어 취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여 만에 "황실당"의 당수인 장훈이 황실을 복원하고자 군대를 동원해 북경 정부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는 총통 여원홍을 쫓아내고 신해혁명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선통제를 다시 왕위에 앉힙니다. 


선통제를 앞세운 북경 정부에서는 려원홍에게 다시 북경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지만,  여원홍은 이를 거부하고 퇴위를 결심하게 됩니다.



                  가라 가라

  

                    




아마도 이 시점부터 그가 중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정부를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국내 여운형 관련 기사에서는, 1918년 11월 하순 미국대통령 윌슨이 근동의 대세를 조사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인 크레인을 상해에 파견하였는데, 이때 여운형이 그를 방문하여 한국 사정을 설명한 후 미국 대통령에게 청하는 서류를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아일보 통신원 여운형은 이때 나이가 고작 32세였던 상황이고 통신원이 되기 전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그의 아우 된다는 여운홍은 그보다 나이가 다섯살이나 어린 27세에 불과하였습니다. 제 생각에 당시 윌슨대통령의 심복 크레인이  만나 한국의 상황을 설명듣고 청구하는 서류를 접수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이는 여운홍이나 여운형보다는 여원홍으로 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여원홍은 이 시점에 장훈의 황실 복벽사건으로 북경 정부하고는 완전히 인연을 끊어버리고 상해에 남하하여 새로운 정부를 만들 구상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위의 연설을 한 시점은 1919년 7월 이었고 이로부터 두달 지난 시점인 1919년 9월 27일 상해대한인민단임원선거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때 상해민단장으로 피선되게 됩니다. '상해 민단장'이란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면, '상해 국민정부 대표' 라는 말과 같은 의미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독립신문에서는 그에 대해 "주석"이라는 칭호를 거리낌없이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8. 1920년 11월 4일 신한민보 상해한인학교 교직원 여운형과 교장 여운홍 


상해한인학교 여운형.JPG


8. "

     음들" 편에서 관련된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9. 1921년 8월 4일 신한민보 상해 임시정부  여운홍 연설 (독립신문의 같은 날 여운형 연설 기사 인용)     

                  

                                                 

여운홍.JPG  

  

 9..NEW 

       FACE   http://saminbon.com/xe/945610 msn010.gif편에서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10. 1927년 7월 21일 동아일보, 중국 대총통 려원홍(黎元洪) 기사


     려원홍 유치원.JPG


 10.Give 

             It To Me http://saminbon.com/xe/945756 msn010.gif편에서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꿈꾸지 않으면" 편에서도 이야기가 계속 될 예정입니다. 





11. 1910년대 인천, 안산, 수원지도 


11. 조

  선의 지리적 영역과 관련된 부분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중간에 자주 인용이 될 예정입니다.  



1919년 인천지도.JPG 

안산.JPG


수원지도(1914).PNG


위 인천, 수원, 안산을 연결시킨 지도 / 수원 안산이 겹치는 부분에 표시된 "개국(開國)" 글자


인천수원안산.png

12. 대구부에 있는 함흥


함흥 대구.JPG


13. 평안북도에 있는 안동현과 인천안동현 호열자.jpg



2017.09.29 


정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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