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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경
조회 수 : 53
2017.08.11 (17:54:57)




                     무영탑



                      




아래 기사는 동아일보 1924년 7월 28일 기사로 "탑동공원"과 관련된 것입니다.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늘 탑동공원과 탑골공원을 같은 것으로 묘사합니다. )


한 독자의 투고란인데, 핵심 요지는 경성에 남산공원이나 장충단 공원이 있기는 하지만 탑동 공원처럼 시민들을 위한 훌륭한 휴식처가 없다는 것입니다. 탑동 공원으로 들어가는 북문은 특히 북부 인민(조선인)이 많이 출입하는데, 이 북문이 폐쇄되어 있으니 이를 좀 열어달라는 내용입니다.


.동아 탑동.JPG  



위 기사를 읽어보면탑동공원도 나오고 남산공원 장충단공원 다 나오고 있는데 도대체 저게 서울이 아니라면, 그리고 탑동 공원이 지금의 파고다 공원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 기사 중 보라색 줄 부분에 탑동공원의 북문이 나오고, 조선인들을 북부 인민이라고 호칭하는 부분은  좀 생소하게 들립니다. 지금의 한반도의 서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중국의 랴오닝 성의 서울 심양에서는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래 좌측 좌측 기사는 1946년 2월 2일, 우측 기사는 1946년 2월 19일 공업신문에  실린 탑동의 '탑골공원'(현 종로 파고다 공원)의 탑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탑골 원각사 탑 미군이 작업 완성, 탑동 다보탑의 기쁜 갱생 이라는 제목과 함께 4세기 반만에 미군 소좌 라이언의 지휘로 1778 기술대대에서 작업을 한 결과 탑동 공원의 원각사 탑이 드디어 자태를 드러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경성의 탑동 공원은 4세기 반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 안에 세워져 있던 탑은 시민들의 위안이자 절개였고 희망이었습니다. 또 탑동 공원은 1919년 민족대표들이 최초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5천여명의 시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3.1 운동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위 노래의 무영탑은 조선 초기 심양(봉천)에 세워져있던 궁궐 '무영전'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을 듯합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8년 4월 2일 기록에는 봉천 무영전에 황제가 거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 황제가 명나라 황제라고 해석해왔습니다.)


근세 탑동 공원은, 주로 왕족과 귀족들이 모여서 연회를 베풀던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1913년  7월부터 지금의 비원과 같이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게 됩니다. ( 위 무영탑이 있던 지역을 부여 땅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가사에 등장하는 서라벌은 상해 임시정부가 있는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캡처1.JPG          캡쳐2.JPG 


1929년 4월과 8월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경성의 탑동 공원이 마치 폐허와 같고, 또 황무로 변해가고 있다는 기사를 실어올리고 있습니다.

탑동 폐허.JPG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후, 1930년 1월 동아일보의 표제부의 상징 마크가 아래의 1에서 2로 바뀌게 됩니다. 


                                        1. (동아일보 창간호~1929년 12월 말)                     2.(동아일보 1930년 1월 1일부터 주욱) 

                                   동아일보 표제 1.JPG                                                                                            동아일보 표제부.JPG                               



                                                                                                                 

  사진이 1에서 2로 바뀌기 직전인 1929년 12월 26일  동아일보에 아래와 같은 사진이 등장합니다.  신년에 제작 배포하겠다고 한 신년 달력 사진입니다. 한반도 각 도의 구분도 제대로 안 이루어진 초기 단계의 지도입니다. (1919년 탑동공원에서 3.1 독립선언서와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울려퍼진지 10년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사진을 보다가

    조선지도.JPG


1929년 경부터 그 기미가 보였는지, 안창호 선생은 만주 조선인들이 거주할 땅을 찾기 위해  필리핀 지역을 헤매기도 합니다. 한편, 조선인들은 1929년 광주 시위를 시작으로 시위가 계속되더니만 동아일보의 이 달력 사진이 등장한 다음 다음 날인 1929년 12월 28일 경성지역에서 전 학생들의 가두 시위와 만세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더니 1930년 1월의 전국 남녀학생들의 시위 상황은 이미 통제 불능이었습니다. 특히 전 국토의 학생들이 시위를 하였고 특히 경성과 함흥 지역의 학생들의 경우 목이 쉬도록 만세를 외치며 통곡을 하였고 단체 자퇴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사상범으로 몰렸고 학생들 수백명이 동시에 감옥으로 끌려가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위가 폭발하기 시작한 1930년 1월 17일의 동아일보 기사를 올려드리겠습니다.(언론에서는 광주학생 시위의 여파로 인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고, 또 광주 학생 시위는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들의 사소함 감정 싸움 때문인 것으로 단정내린 바 있습니다.) 참고로 이 상황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1년전의 상황입니다.


학생 시위.JPG 



           타향의 봄



                   




참고로 아래 좌측 사진의 경우, 외국 사람이 공개한 사진인데, 경성 남대문 옆이라고 합니다. Textile building 이라는 단어가 저로서는 이해가 잘 안가는데 제 생각에는 경성의 남대문 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뒤의 배경에 보이는 건물들을 보더라도 당시 경성은 매우 번화한 도시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우측에 보이는 지금의 서울역은 한일 합방 시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건물 모습에서부터 좌측 사진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남대문.JPG 서울역.JPG 


여기서 잠깐 언급드리고 싶은 것은 위 동아일보 기사의 학생 시위와 관련하여 학교 이름 뒤에 붙은 고보(高普)의 의미는 지금으로 치자면 대학교를 의미합니다. 옛 말에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낸 다는 말이 있듯이, 위 1930년 동아일보 시위 기사의 "경성"에 있는 학교들은 랴오닝성도의 심양이 아니라, 진짜 조선의 서울인 "한성"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성과, 당시만해도 조선인 인재의 집합소였을 명문학교들과 관련하여서는 추후에 다시 언급해드릴 예정입니다. 다만 한국역사통합정보시스템에서 "이전"이라는 단어를 검색하시면 1930년대 초중반에 "이전"되는 학교 및 기관 들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탑동 공원 뿐 아니라 경성의 대표적인 대학 이화여고보와 보성고보도 아래와 같이 한반도 서울에 새 둥지를 트게 됩니다. 물론 이 학교들은 한반도 서울로 부지를 옮긴 후 새로 학생들을 뽑게 됩니다. 


1935년 3월 10일 동아일보 기사 (이화여전 (이화여대) 신(新)교사)                            1933년 5월 14일 동아일보 기사 (새 집을 기다리는 보성전문대(고려대학교))


이화.JPG       캡처4.JPG


개교한 지 50년이 되었다는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는 이보다 좀 늦은 1940년 세브란스 의전(세브란스 병원 포함)과 함께 한반도 서울 연희동에 동양최고의 교사를 신축하기로 하고 200만평 되는 토지를 매수했다고 합니다.


1940년 2월 15일 동아일보 


캡처 7.JPG 


아래는 1935년 즈음하여 중수 재건된 고적들에 대한 소개입니다. 제일 위 좌측에에 보이는 건축물은 수원 화성인데 우리가 조선 정조 때의 건축물로 잘못알고 있는 수원 화성은 사실은 유적지에 재건한 정종 당시의 웅건한 대건축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종이라면 조선 초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형 아닙니까?  저는 혹시 기사가 오타가 난 게 아닌가 싶어 관련 기사들을 다뒤졌는데, 그럴수록 수원의 유적 관련해서는 조선 정종 이름만 검색이 되지 정조라는 이름은 단 한 줄도 검색이 안됩니다. 어찌되었든 조선 정종(正宗)떄 지어진 수원성이 다 허물어져가서 석조로 다시 재건한다고 합니다. 


1935년 1월 1일 동아일보


 캡처 9.JPG수원성.JPG



아래는 수원에 있는 정종대왕 어진을 모신 화령전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수리한다고 합니다. 간단한 수리 정도가 아니가 금년부터 "공사 착수"한다는 기사입니다. 


1934년 2월 4일 동아일보


캡처 8.JPG


동아일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중앙일보의 기사에서도 어김없이 정종대왕이라고 적고 있고, 또 수원 지역 유적 재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1935년 8월 21일 동아일보 


캡처 10.JPG


문제는 학교 부지부터 각종 유적들 중건하고 재생할 부지까지 어마어마한 땅이 필요할텐데 도대체 저들은 그 많은 땅은 어떻게 다 조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아래 기사들을 보면, 그 의문이 어느 정도 가십니다.



1933년 11월 10일 동아일보 기사 (설한기 철퇴요구로 3천여주민 초조) 


신당리 주민에게 토지를 헐값에 팔고 나가라고 요구하였고 주민들 300명이 궐기대회를 열었다는 내용입니다. 참고로 신당리에는 문화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 신당리로 불리는 지명이 너무 많아서 어느 지역인지 확인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


캡처 신당리.JPG



아래 기사는 앞장 "북경아가씨"에서 언급한 만주 이민과 관련있는 내용입니다.  1932년 4월 21일 중앙일보 기사로 명년도(1933년)부터 조선인들에 대한 만주 이민 계획을 기필코 실현하겠다는 총독의 시국 담화 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이 시기에 한반도 땅에서 만주로 ,러시아로 저 극동 사할린으로 돈 몇푼 받고 쫓겨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았습니다. 


캡처 만주.JPG


이렇게 돈을 많이 들여 고적들을 중수하고 수리하고 공사하느라 공을 많이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종독부가 조선의 모든 고적들을 완벽히 재현해내지는 못한 듯합니다.  가령 그 예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경주의 분황사탑을 예로들 수 있을 듯합니다. 


아래는 부산신문 1946년 5월 3일 기사입니다. (기사 제목은 현란했던 우리문화) 현재 경주에 세워져 있는 분황사탑을 분황사 9층탑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저 당시까지만 해도 분황사탑이  9층이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가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저게 원래 몇 층이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습니다.


부산신문1.JPG  캡처 분황사.JPG




                    귀국선


                              

                             




한반도 땅에 그럴 듯하게 문화 유산 재건 작업이 이루어진 후인 1945년, 뜻밖에 일본이 항복을 했다는 소식이 들리게 되자 해방을 맞이한 것으로 잘못 이해한 조선인들은 백의 동포를 찾아서, 안식처를 찾아 한반도 땅으로 뱃머리를 향합니다.


해방 당시 중국 본토에 있는 조선인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내용이 없어, 어떤 식으로 귀국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다만, 제가 이런 저런 문헌들을 뒤지다가 우연히 학민사에서 출간한 "장강일기"라는 산문글을 접하게 되었는데, 필자는 여성으로 남편을 따라 상해에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수십년간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 독립 투사들을 뒷바라지 했던 경험을 이 글에서 매우 소상히 서술하고 있었으며, 해방 당시의 상황도 짧게나마 서술하고 있어, 이 글을 읽은 저로서는 뜻밖의 수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캡처 장강.JPG


이 책은 그 아드님 되시는 분이 어머님의 임시정부 당시 활동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할 뿐 아니라 어머님의 기억력이 틀림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출판까지 한 것인데, 상해 임시정부에 그 오랜 기간 계시면서 임시정부의 속 사정을 빠삭하게 알고 계신 어머님께서는 아쉬웁게도 상해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인 여운형(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동아일보 통신원 출신의 여운형은 진짜 여운형이 아닙니다.)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으셨고, 장강 물줄기를 따라 대장정에 올라 중경까지 거슬러 올라간 상황과 중경에서의 독립운동 상황들이 소소하게 묘사되어 있었음에도, 중경 임시정부와 동고동락했던 중경 중화민국 정부와 임삼 주석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어머님께서 김구 선생과는 매우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는 것만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 분은 당시 이씨 조선의 굉장한 귀족 가문이었고, 조선 땅에 가진 땅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듯하여, 해방 당시 조선 서민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귀족 신분의 독립투사로 특별히 장개석 정부에서 배편까지 마련하여 조선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하는데도, 이 여성은 귀국 당시 상해 선착장에서부터 조선 땅에 도착하기까지 미군이 조선인에게 보여준 태도에 대한 실망과 한숨과 치욕감을 감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해방의 기쁨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고 마치 전쟁 포로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제가 제 글 "출발"편에서 언급드린 것처럼,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에 진짜 해방이 된 줄 착각하고 아래 동영상에서처럼 기쁨을 감추지 태극기 깃발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던 조선인들을 향해 총격을 가해 조선인을 살상했다는 미군의 태도를 보면, 장강일기의 주인공의 한숨의 뜻을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귀국선



                            



그런데, 해방 후 귀국선에는 꼭 조선인만 승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아래는 1946년 5월 3일 부산신문 기사입니다. 수상서(물위에 있는 경찰서 ==> 해경대) 에서 발표하기를 20일 상오 8시경 싱가폴에서 우리동포 3천 5백명을 실은 배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캡쳐 싱가폴.JPG


 이 기사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1946년의 싱가폴의 현황을 이해해야 할 듯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이 싱가폴을 점령, 해군기지를 세우게 되자, 1942년 1월 일본이 말레이 반도를 침략해 싱가포르와 영국 주둔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당시 싱가폴을 점령한 일본군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숙청대학살입니다. 같은 해 218일에서 34일 사이에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중국인 화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였고 학살은 말레이시아계 중국인 화교들로 확대되게 됩니다.  이 학살로 희생된 사람 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일본 정부 측에서는 약 4 ~ 5천 명이 학살에 의해 희생됐다고 추산하고 있으며,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화교 측에서는 약 10여만명이 학살됐다고 추산하고 있고 전후 학계에서는 약 25천 명에서 5만 명 사이의 중국인 화교들 및 싱가포르인들이 학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범죄는 일본군이 싱가폴을 점령한 후 포로들에 대한 학대였는데. 1만 2천명의 연합군 포로들과 현지에서 징발당한 9만명의 강제 노역자들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문제는 야만적인 포로관리를, 일제로부터 징발되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떠맡아야만 했던 조선인들이 맡게 되었다고 하는데, 싱가포르 전쟁에서 일본이 패한 후 강제로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들 다수가 전범으로 몰려 처형이 되게 됩니다. 


아래는 일본이 전쟁 포로들을 동원하여 만들었다는 "콰이강의 다리"를 주제로 1957년에 제작한 유명한 영화 "콰이강의 다리"입니다.  이 영화를 잘 모르는 신세대들을 위해 일단 주제곡을 올려드리겠습니다.



          콰이강의 다리  



            



1946년 일본이 영국군에 패하면서 싱가포르 점령부대에 있었던 일본인들은 싱가폴을 떠나야만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싱가포르에 남아있던 일본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주민들의 처벌 요구가 있었고, 강제 징발 당했 싱가폴에서 포로 관리를 떠맡아야 했던 조선인 군속들이 일본인들보다 훨씬 더 잔혹하게 싱가폴에서 주민들을 학대하였다는 이유로 상당수 처형이 되고 남은 일본군 3천여명이 위 귀국선을 타고 조국으로 돌아간 듯한데, 하필이면 이 시점에 부산신문에서 싱가폴 동포가 귀국선을 타고 오고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이 일본군들이 전부 한반도 땅으로 입성하였던 듯합니다.



                  귀국선



               


중국 본토에서는, 그 시기 즈음하여 중국 공산당이 상해를 점령하게 되지만 군벌 장개석을 총통으로 섬기는 국민당 정부는 여전히 중국 남경에 정부를 구성한 채 건재한 상황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래 공업신문 1947년 11월 21일 기사에 등장하는 인천의 귀국 동포 6만명이라는 숫자와 그 이후 1948년 기사에서 만주에 있는 동포를 구호하기 위한 배가 인천항을 출발해 중국 천진으로 간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 그리고 1949년 영남일보에서, "서울에 피난온 영남지역의 인재들이 많이 있다."는 기사를 참고해볼 때, 상당수의 남조선 귀족들이 이 시기에 한반도로 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울러 이 시기에 귀국한 남조선 귀족들이 이승만을 국민적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이승만은 북조선의 이씨 왕족이 아닌 남조선의 이씨 왕족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북조선 남조선에 관하여서는 조만간 조금 더 상세히 언급드릴 예정입니다.)


인천항3.JPG 인천항2.JPG



원래 대만이란 땅덩어리에는 원주민인 생번과 이주민인 숙번이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역사가들이 대만 땅의 주인을 원주민과(생번)과 이주민(숙번)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일본군이 대만의 주민들을 너무 많이 죽였기 때문에, 그 중 죽은 주민들을 '생번'이라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문맹인으로 몰아보려는 술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독립신문 등의 기사를 참고하면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던 시기(1935년)를 전후하여서부터 삼십년 동안에 수백만명에서 무려 삼백만명에 이르는 대만의 주민이 학살을 당할 정도로 대만은 일본에 대한 저항이 심했던 나라라고 합니다. 제 생각에 아마도 이 사건은 전봉준의 동학 운동 당시의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 기억으로 이 시기 한반도 땅에서 무자비한 학살이 일어났던 것은 전봉준의 동학 사건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 녹두장군 전봉준 >


캡처 전.JPG


그런데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전인 1930년, 위 동아일보 달력이 배포되기 시작한 그 해, 만주 부여 땅에서 엄청난 저항이 있었던 것 못지 않게 대만에서도 또 한번의 엄청난 항거가 벌어집니다. 이 시기인 1930년 10월 발생한 "우서사건"에서는,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주민들이 호미와 낫을 들고 총으로 무장한 일본인들과 죽기 살기로 싸웠다고 하는데, 이 때 대만의 마지막 남은 원주민들이 거의 다 전멸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백과사전에서는 우서사건의 이유에 대해, 그들이 살고 있던 땅이 개발되면서 강제 이주 및 강제 노동을 강요당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기적으로 동아일보가 한반도 달력을 배포하던 시기가 1930년이었던 점, 그리고 일본이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이어서 한반도 땅의 주민들을 만주로 강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이 대만에서 일어난 일아라고 주장하지만, 여타 신문 기록을 보면, 이 항거는 분명 대만 조선에서 벌어진 일이었을 듯합니다. 또 현재 타이완의 친일 성향과 상대적으로 반일 감정이 높은 한반도의 성향을 비교하더라도, 이를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국에 거주하는 대만의 독립투사들도 조선인들과 함께 격렬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죽을 떄까지 일본에 대한 저항을 마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미 탄핵된 장개석에 대해 "군인이 정치에 간여하지 말아라" "감금한 조선인 장학량의 감금을 풀어라." 등의 요구를 하였으며, 이를 거부한 장개석을 피해 중경으로 중국 정부를 이전해버린 중화민국 임삼 주석의 고향이 대만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종교는 보기 드물게도 도교였다고 합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자기 목숨을 아까지 않고 침랙주의, 제국주의에 몸을 던져 항거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살던 대만 땅이 미국에 의해 해방이라는 것을 맞이한 이후, 이승만의 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박정희희 쿠데타 정권 수립, 전두환의 광주 대학살 등등 반세기 이상을 잔인한 피의 학살을 마다하지 않는 군사 정권이 위세를 떨치게 된 동기는 아마도 해방 이후 싱가폴 등지에서 활동을 하던 제국주의 군인들이 한반도에 대량 입성한 것과 관련이 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다음 이야기가 "손대지마"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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