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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7 (23:31:28)



                             깊




                          




                              우리들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쩌면 어린애들 놀이같아
                            슬픈 동화속에 구름타고 멀리 날으는
                            작은 요정들의 슬픈 이야기처럼
                            그러나 우리들 날지도 못하고 울지만
                            사랑은 아름다운 꿈결처럼
                            고운 그대 손을 잡고 밤하늘을 날아서
                            궁전으로 갈수도 있어

                            난 오직 그대 사랑하는 마음에 바보같은 꿈꾸며
                            이룰 수 없는 저 꿈의 나라로 길을 잃고 헤메고 있어

                            그러나 우리들 날지도 못하고 울지만
                            사랑은 아름다운 꿈결처럼 고운 그대손을 잡고
                            밤하늘을 날아서 궁전으로 갈수도 있어

                           난 오직 그대 사랑하는 마음에 밤하늘을 날아서
                           그대 잠든모습 바라보다가 입맞추고 날아오고파



 

1

 934년 523일, 극우 매일신보에 함흥 이성계의 발상지 반룡산의 분묘를 이전한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립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매일신보는 기사 내용을 비공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기사 제목만으로는 분묘를 어디로 옮겼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함흥을 위주로 대만 전체가 다 타이완으로 옮기는 추세라면 반룡산 분묘 역시 분명 타이완으로 이전하였을 거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그런데 타이완 신베이와 대북 지역에는 크고 웅장한 사찰과 사당들이 많이 있는데 1934년 이후에 지어진 사당은 좀처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1927년에 세워졌다는 사당이 있기는 한데 그게 꼭 함흥에서 이전해 간 분묘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구요.

 

사실 함흥부에는 이성계 부모의 묘인 정릉과 화릉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성계 조부모의 능인 의릉과 순릉이 있었고 이성계의 고조부모의 능인 덕릉과 안릉이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조부(목조, 이안사)의 묘인 덕릉이 공주(孔州)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의 백성의 되기를 원하는 두만 이란을 위해 공주(孔州)에서 갑산(甲山)까지 읍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공주에 있다는 목조의 능은 동시에 두만 이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란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조선왕조실록에 함흥부의 북쪽 30리 의흥부(義興部) 달단동(韃靼洞)에 목조(이안사)의 덕릉이 있다고 한 내용을 참고한다면 이란이 지금의 압록강 신의주 인근을 포함하는 영역에 걸쳐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또, 이란 지역은 공주(孔州)로부터 천리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해방 후 미국의 "북위 40도 이하 대만설", 그리고 이란이 현재 타이완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을 참조하면 지금의 북한 지역의 대부분이 두만 이란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추정될 뿐입니다.  

 

반룡산의 능묘를 이장하면서 정릉과 화릉만 이장했는지 아니면 함흥부에서 관리하고 있던 정릉 화릉 의릉 순릉 덕릉 안릉 6개의 능을 전부 이전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함흥부 전체가 타이완으로 이전하는 상황이었다면 이 6개의 분묘도 함께 이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그런데 조선 건국 초기 여진인 이지란이 죽기 전에 이성계에게 보낸 글에서 자신은 타국(他國)에서 죽지만 고향 풍속에 따라 시체는 불태워 고향에서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이지란 등 여진 개국공신들의 능묘들도 함흥부에 적지 않게 모여 있었을 법합니다.

 

이란 지역은 목조의 능이 있던 곳이고 또 조선 개국공신들을 많이 배출한 땅으로 그 능들을 함흥부에서 다 관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여진 개국공신들과 개국의 기반을 제공한 여진 땅 없는 조선은 앙꼬 없는 찐빵 같은 신세인지라 이들 여진인들의 위패 정도는 챙겨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해봤습니다.

 

그런데 신베이 대북 지역에 크고 웅장한 사당들이 많이 있는 것과 달리 이란현 지역에는 앞장에서 본 충렬사하고 충효사같이 아주 작은 사당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대만 이란현에서 매우 신기한 건축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1970년에 세워진 도교총본(道敎總廟) 삼청궁(三淸宮) 이라는 도교 사원인데, 이 시기면 이미 미신타파 등의 계몽교육으로 한반도에서는 도교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때였습니다.

 

또 분묘가 이전된 시점은 1934년이고 대만 도교총묘((道敎總廟)의 경우 1970년에 지어졌으니 이곳에 이란인들의 위패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도 힘이 듭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건축물이 상당히 웅장하고 규모도 큽니다


캡처13.JPG

캡처17.JPG 


삼청궁이란 현판이 눈에 뜨입니다. 


캡처18.JPG 


도교총묘의 전체 모습입니다.


캡처19.JPG


아래 사진들은 도교 사원에 모셔진 신과 신도들이 도교 의식을 치루는 사진들입니다. 제일 위 사진에 보이는 세분의 신이 바로 삼청의 신들입니다. 


캡처20.JPG


 캡처21.JPG 


캡처23.JPG


 

 그런데 불교 사찰들이 종교 건축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만에 도교총사당이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이란현에 들어선 것은, <조선도교이야기>의 저자인 저에게는 무척 의미심장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대만 도교총묘 측에서는 뒤늦게 이 종교 사원을 짓게 된 이유가 주민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는데, <조선도교이야기>에 드러나고 있듯이 사실 조선의 개국 이념은 도교에 가까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함흥에서 출생했던 도교 광팬 태종 이방원 이외에 조선 중종도 이에 못지 않은 광팬이었는데, 중종 당시 이를 만류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신하들의 상소문을 보면, "우리 나라는 삼청(三淸)에 초제를 지내면서 노자(도교를 의미)를 (宗, 개국이념)으로 삼았다"(중종 25년 4월 30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삼청신앙이 조선의 개국 이념이자 조선 도교의 근본이 되어 왔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서울의 청와대 인근에 있는 삼청동이란 지명도 이런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는 지명인데사실 알고 보면 중국 본토에 있는 궁실 인근에 삼청궁이 있다면 그 지역은 조선인의 영역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조선도교와 삼청신앙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키작은 하늘 


 

               


  청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이라고 규정하면서 노자사상과 연관 짓고 있지만, 사실 삼청은 조선이 삼성사(三聖祀)를 세워 환인환웅단군을 모셨던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고, 또 삼성(三聖환인환웅단군에 대한 조선인들의 신앙은 삼신(三神)신앙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이 삼신(三神)신앙은 우리의 국경절인 개천절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위서(僞書) 논쟁이 따라붙어 다니는 환단고기 등을 통해서만 어렵게 단군 고사, 부여의 고사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해방 전까지만 해도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 살았던 조선인들은 단군을 하느님처럼 떠받들었고, 그것은 강한 삼신신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3.1운동 이후 사실상 대한민국 정부역할을 했던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래 기사는 19191127일 독립신문 기사인데, 당시 임시정부 임원(김두봉)의 개천절의 감회를 적어놓은 것입니다.

 

김두봉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전에 대종교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대종교의 대종사 홍암 나철(1863~1916)이 대종교를 창시가 아니라 중광으로 선포한 것은 단군조선 시대의 신교(神敎)로부터 이어오다 고려 중엽 몽골의 침입으로 문이 닫힌 우리 고유 종교를 다시 일으킨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대종교는 항일 독립투쟁의 본산으로 유명하며, 항일 운동 과정에서 10만명이 넘는 애국지사가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김두봉은 대종교 교질(敎秩: 믿음의 단계)이 가장 높은 상교(尙敎)의 위치에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상해 임시정부의 조직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히 설명드릴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상해 임시정부에는 조선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각 종교를 대표하는 의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종교단체의 경우 조선의 천도교인이 200만명, 기독교인은 100만명 수준이었고 불교, 대종교도 각기 그 수에 비례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교인 수가 가장 많았던 천도교 대표이자 3.1 독립선언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손병희가 임시정부 의회 의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천도교는 제가 <조선도교이야기>에서 자세히 언급드렸지만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다른 이름이며 조선 도교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천도교인 200만명이라는 수치는 당시만 해도 조선 도교가 조선인의 주된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수치입니다. 또 기독교의 경우도 그 시대 동아시아 여타 민족에게서 보기 힘들 정도로 조선인 신도가 많았다고 하는데,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신문에 투고한 기사들을 읽어보면, 서양인의 하느님 여호와와 조선인의 하느님인 단군을 같은 분으로 믿기로 했던 듯합니다. 아울러 도교의 상제와 천제 단군 역시 같은 인물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천주교는 별론으로 하고, 당시 기독교의 경우, 단군 신앙이 지독했던 조선인들에게 선교를 위해 단군은 조선의 조상이자 하느님. 여호와는 서양의 조상이자 하느님인데 이 둘은 똑같은 하느님.”이라는 공식을 내세워 기독교 선교에 임하였던 것 같고 그래서인지 일제 병합시기에 기독교 계열의 학교였던 만주 명동학교의 교실에는 단군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예배당에도 십자가와 단군기를 함께 놓고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시기 조선에서 동아시아 어떤 민족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유 중에는 일제의 탄압이 특히 심하던 천도교나 대종교도의 옷을 벗어던지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이 급증하게 되었던 탓도 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일본이 조선인 기독교인은 물론 서양의 선교사까지 전례없이 탄압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아래는 19191127일 독립신문기사에 실린 대종교 대표 김두봉씨의 개천절 감회입니다. 김두봉씨 이 감회를 서술하기에 앞서 대종교는 반만년 전 단군이 세운 교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음력 103일은 우리 대한민족의 처음 조상이신 천제(天帝하느님) 단군의 개천경절이라... 무릇 세계민족이 다 그 육체와 영혼이 그 첫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으로 인하고, 그 첫 조상은 하느님이 내려 보낸 이로 믿고 있는 것이 대동(大同)의 사상이라. 우리 대한민족 첫 조상의 역사로 말하자면 43백여년을 지내어오는 금일까지 남녀생산은 삼신(三神)의 점지하며 10세 이전의 어린이가 지식이 어려 위험에 처할 염려가 있는 것도 삼신(三神)이 보호하신다 하니 삼신(三神)은 환인환웅단군이시라 환인은 하늘에 계신 상제시오 환웅은 세상에 내려오신 신인이오 단군은 건국하신 임금이시니 삼신(三神)이 실로 일체인 고로 우리 고사에 하느님이 신단수에 강림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아래는 19211111일 독립신문에 실린 기사로 김두봉씨가 교민들에게 연설한 개천절의 유래라고 합니다.

 

단군이 건국하신 후 단군조는 물론이고 그 뒤를 계승한 역대의 모든 나라들이 다 단군의 건국 위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월일을 택하여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역대로 그 기념의 명칭과 의식과 혹 월일의 차이는 없지 않으나 단군을 건국시조라고 하여 그를 잊지 않고 건국을 기념하는 것은 역대의 공통된 정신으로 볼 수 있으며, 또 그를 상제라 천제라 천왕이라 천군이라 하여(우리 선조의 생각이 철리에 맞고 안맞고는 논외로 하고) 교조로 신봉하여 기념함도 사실이었습니다. 명칭으로 말하면 삼한의 천군제라든지, 부여의 영고회, 예의 무천회, 기씨(기자)의 보본제, 고구려의 동맹회, 신라의 태백산사, 백제의 사중제, 발해의 단계축, 요의 군수제, 금의 장백산책, 고려의 삼성사제, 조선의 숭령전제 등이 이름은 서로 다르나 같은 내용의 기념제였습니다.”

 

이와 같은 단군에 대한 이해는, 대종교인의 믿음 체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공표하는 조선의 종교에 대한 총체적 정의가 됩니다.

 

아래는 태평양회의(192111월부터 19222월까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제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 사항의 한 조항 중 일부분입니다.

 

192211일 독립신문

 

"한인은 선사시대로부터 일천삼위(一天三位)의 체계적 종교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선언은 조선의 삼신신앙 정신을 전 세계에 알리고 동시에 삼위일체의 여호와 하느님과, 조선을 개국한 일천삼위의 단군 하느님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여 조선인의 문화적 자존감을 드높여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을 보면, 각지 조선인들의 대표를 뽑아 모아놓았다는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103일 개천절 행사를 거의 종교의식처럼 행하고 있었으며, 단군이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는 어천절 행사도 그에 못지않게 성대하게 치루고 있었습니다.

 

임시정부 어천절 행사의 모습을 보면, 조선시대 단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던 숭령전에 임금이 직접 어제를 모셨던 모습을 현대식으로 재생해낸 듯하였는데, 아마도 당시 임시정부 의정원에 봉안되었던 단군의 영정 액자는 숭령전에 모셔져있다는 단군의 영정 원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19151215일 권업신문 기사를 보면, 평양 숭령전에 모셨던 단군 대황조영정은 고대로부터 봉안하여 오던 것인데, 수년전 사진관에서 촬영된 것을 재활영하여 발행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


그런데 급기야는 대통령 이승만이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한 19214, 단군이 하늘나라로 승천한 기념 의식(어천절, 음력 315)을 아래와 같이 거행합니다.

 

독립신문 1921430일 기사입니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장내에는 만국기(일본기를 제하고)로 찬란히 꾸였고 정면에는 붉은 꽃으로 두른 비단폭에 금색 글씨로 어천절이라 적은 족자가 걸렸으며 족자 좌우에는 태극기가 숭엄히 늘어서 있고 그 우측엔 가미고이 (높은 은덕) 그 좌측에는 도가오소(길이 사모하는 정)라 적힌 흰색 천으로 된 족자가 걸렸으며 또 그 위쪽에는 화연홍단에 금색 글씨로 한배검(단군 할배)이라 새겨 붙인 액자가 존엄히 걸려 있어 단상에 놓인 미려한 꽃바구니와 어울려 마치 찬연한 옛 신시(神市, 환웅이 세웠다는 나라)를 엿봄과 같았다. 강당 복도까지 넘쳐선 군중은 정숙한 태도로 혹 앉기도 하고 혹 서기도 하여 한배의 옛 크신 은덕을 추억하고 비통과 참담한 정을 못 이기어 혹은 고개를 숙이고 앉았으며 혹은 활기 없는 얼굴로 석상과 같이 단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각에 이르러 새로 임명된 민단장 홍진씨가 등단하여 간단한 식사를 하고, 신규식(국무총리)씨의 축하봉송이 있은 후 일동은 일어서 엄숙한 경례를 행하였다. 조완구씨와 김원식씨의 신가(신가(神歌)합창이 있은 후..... 이어서 대통령각하의 독실한 찬송사 낭독을 마치고 일동이 기립하여 애국가를 합창한 후 만세를 세 번 부르고 식을 마치니 430분이더라.



           정말로 사랑한다면


           .


 

당시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찬송사 내용은 같은 날(독립신문 1921430일자) 기사에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실립니다. 

 

"온 세상이 캄캄할 때에 우리에게 나타나시어 빛과 터와 글을 주시니 알음과 지킴과 행함이 넉넉하였도다 그 힘을 보이시고 돌아가시어서도 옛 자취를 머무시니 정신과 삶과 즐김이 영광과 평안과 행복을 얻어 문채롭게 건전하게 넓이 사랑하며 꿋꿋하게 이어 왔도다. 우리 황조는 (거룩하시사 크시며 지혜로 오시며 힘을 주시어 이를 쫓아 베푸시니 인류의 한배시며 ) 임금이시며 스승이셨다. 하물며 그 핏줄을 이으며 그 가르침을 받아온 우리 배달민족이리오. 오늘을 맞아 기쁘고 고마운 가운데 두렵고 죄 많음을 더욱 느끼도다. 나아가라신 본뜻이며 고로 어라신 깊은 사랑을 어찌 잊을 손가. 불초한 승만은 이를 본받아 큰 짐을 메이고 연약하나마 모으며 나아가 한배의 끼치심을 빛내고 즐기고자 하나이다.”

 

한국역사통합정보시스템에서 찬송사를 검색하시면 정확히 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신문들 기사를 보면 위 기사 중 조선인들의 단군 신앙의 진수”인 빨강 글은 삭제한 채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최근 신문 기사로, 언론인들의 조선인의 단군 신앙에 대한 역사 왜곡의 현장을 목격하실 수 있습니다.


2013년 코리아스피릿 기사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38144


2015년 브레인미디어 기사

http://kr.brainworld.com/Opinion/16503

 

위 기사의 공통점은 현대인의 "귀차니즘"을 습관를 이용하여(직접 독립신문 기사를 확인할 사람이 없을 거라는 확신같은 거, 저도 사실 처음에는 귀찮아서 독립신문 기사를 확인 안하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 하느님으로서의 단군의 신성성을 부정하고 단군을 단순히 한민족의 조상, 조선을 건국한 왕 정도로 축소시키려고 한 의도가 엿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는 지금 현재 한민족이 생각하고 있는 단군의 이미지에 딱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이승만은 줄곧 미국에 머물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언제부터 미국에서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구심이 듭니다.)

 

과연 그는 1921년 상해 임시정부에 몸 담은지 몇 개월 만에 위 어천절 행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거행하고는 미국으로 가버린 후 다시는 임시정부에 얼굴을 내밀지 않게 됩니다.

 

참고로 아래 2013년 노컷뉴스 신문 기사를 보면 유영익이라는 국사편찬위원장이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조선왕조 왕족 출신이어서 최고의 독립운동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여느 독립운동가보다 신분적으로 격이 높은 조선왕조 왕족 출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발군의 총명함과 타고난 건강체질' '동서학문에 두루 통달'했다"는 점 등을 초대 대통령 이유로 꼽았다고 합니다.

<원문보기>

http://www.nocutnews.co.kr/news/1114435#csidx0279baf04a9cb9c976a611353500913

 

또 한가지 이승만이 스스로 자신의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하였다는 기사가 눈에 뜨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061421141&code=940100 (경향신문 2013년 10월 기사)


정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나이 44세면 1918년 경으로 한일 합병조약 이후이고, 해방 직전 경에 조선 왕실 이왕가가 일본 황실 족보에 이미 이름을 올린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저 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이해하려면, 근세까지 중국의 남쪽 지역에 터잡고 있던 대륙 일본과 조선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정말 이야기가 끝이 없습니다. 


일단 제가 생각하는 이승만에 대해서는 추후 올릴 황성신문편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 영향으로 청나라 황실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상황에서 이미 왕실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먼 얘기가 되어 버린 상황이었을텐데 어쩌다가 상해 임시정부가 이씨 왕가의 인물을 첫 대통령으로 추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하여서도 충분히 논의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승만은 얼마 안있어 상해 임시정부에서 탄핵됩니다.)

 

추가적으로, 아래는 이승만이 상해를 떠난 그해 가을, 임시대통령이었던 안창호의 송축사입니다.

 

"오늘에 대한 남녀노소 다 일어나 즉 한마음으로 태백산 단목 아래에 탄생하사 건국하신 시조단군을 송축하는도다. 거룩하다 우리 시조단군. 그 덕이 높고 업이 빛나도다. 그 열어주신 남은 땅은 삼천리의 한반도요 그 오천년 동안 길러오신 남은 자손은 이천만의 용장한 대한사람이로다 황막한 세상에 나라를 열으시고 먹고 입고 사는 법도를 가르치시며 도를 세우고 교를 베푸사 뭇 백성으로 생존과 안녕의 행복을 누리게 하셨도다 곧음과 굳셈과 어짐과 밝음으로 그 몸을 가지사 자손만대에 규범을 지으셨도다. 아아 그의 자손 우리 대한 형제자매 그 높고 깊은 덕을 길이 사모하고 느끼는도다. 아아 오늘에 조상의 은덕을 찬송하는 우리 형제자매 서로서로 사랑하여 마음을 합하고 힘을 같이하니 우리 조상의 존엄이 더욱 드러나고 우리 민족의 번영이 무궁하리로다."

 

위 기사 중 주황색 색깔을 입힌 글들은 상해의 독립신문 뿐 아니라 당시 관북지역을 대표하던 단재 신채호가 주임으로 있던 권업신문, 그 외에 해조신문, 단산시보 등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단군에 대한 설명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일본은 단군을 부정하였으며 한일 합병이후 조선의 국조를 단군이 아닌 일본의 국조인 신무천황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기 시작합니다. 또 조선 국토 전국에 신무천황을 국조로 하는 일본 신사를 세우게 됩니다. 동시에 반만년 조선의 역사를 2천여년으로 줄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단군을 조상이자 하느님으로 알고 섬겨온 조선인들에게는 더 할 수 없는 서러움을 주었던 듯합니다.

 

저는 솔직히 도교총묘에 모셔져 있는 저 삼신이 과연 조선의 삼신인지 아니면 일본의 삼신인지 그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좌우지간, 역사는 진시황제가 만리나 되는 장성을 쌓은 것을 세계사의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하는데, 현대사에서 갑작스레 사라진 성(省)급 대도시와 그 지역의 무형문화 유산들이 통째로 만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은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 못지않게 세계사의 불가사의한 일로 기록되어야 마땅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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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독립신문 등 각종 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우리 민족의 단군 신앙에 관한 기록들을 발췌하여 월량대표아적심편에서 올려드릴 예정입니다.

 

또 함흥분묘 관련 이야기가 애인 있어요편에서 이어질 예정입니다.


2017.08.10


정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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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경
237 2017-10-05
31 고구려 벽화 무덤 첨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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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한일합방조약과 우리지방산업부흥 첨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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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2017-09-10
29 Give It To Me 첨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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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애인 있어요 첨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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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2017-08-31
27 총맞은 것처럼 첨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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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첨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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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못찾겠다 꾀꼬리 첨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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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NEW FACE 첨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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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ected 깊은 밤을 날아서 첨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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